한국전쟁의 아픔 간직한 대전의 주요 유적

25일은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당시 인구 12만 명의 대전도 밀려드는 북한군의 침공으로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폐허 더미를 딛고 쌓아올린 눈부신 발전은 이제 전쟁의 흔적을 찾기조차 어려울 지경이다.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대전지역에 남아있는 역사의 현장을 돌아봤다. (편집자 주)  

1992년에 발행한 ‘대전시사’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이 남침한지 이틀이 지난 27일 정부는 비상 국무회의를 열어 정부를 대전으로 이동하기로 결의했다. 정부가 대전으로 천도하자 서울과 각지에서 피난민이 앞다퉈 남하해 대전에는 많은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옛 충남도청.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6월 27일 국무회의 의결로 수도를 대전으로 옮겨 임시 정부청사로 사용됐다.
옛 충남도청.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6월 27일 국무회의 의결로 수도를 대전으로 옮겨 임시 정부청사로 사용됐다.
중구 대흥동에 있는 옛 충남도지사공관.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이승만 대통령의 임시 관저로 사용되고 대전협정이 체결된 역사적인 장소다.
중구 대흥동에 있는 옛 충남도지사공관.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이승만 대통령의 임시 관저로 사용되고 대전협정이 체결된 역사적인 장소다.

◇역사적 대전협정, 충남도지사공관에서 체결
대전으로 피난 온 정부는 충청남도청을 임시 정부청사로, 이승만 대통령은 충남도지사 공관을 숙소로 이용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북한군이 대전 근방까지 진격해오자 7월 14일~16일 임시 정부는 또 다시 대구로 이동했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이 임시 거처로 사용돼 대전 경무대로 불렸던 충청남도지사 공관에서는 7월 12일 미국과 역사적인 대전협정이 맺어졌다. 정식 명칭은 ‘재한 미국 군대의 관할권에 관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협정’으로 주한 미군의 재판 관할권을 미국이 행사할 수 있게 됐다. 대전협정은 그 후 1966년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이 체결될 때까지 효력을 발휘했다. 
 

대전시청 앞 보라매공원에 있는 대전지구전투호국영웅비.
대전시청 앞 보라매공원에 있는 대전지구전투호국영웅비.

◇보라매공원 대전지구전투호국영웅비, 순직한 818명의 미군 이름 새겨
서구 둔산동 대전시청 앞 보라매공원에 있는 대전지구전투호국영웅비는 한국전쟁 당시 대전지구 전투 상황을 증언한다. 북한군이 남침하자 UN 결의에 따라 1950년 7월 1일 미 지상군 제24사단(사단장 소장 딘(William F. Dean)이 처음 한반도에 투입됐다. 24사단은 스미스부대를 선발대로 예하 부대를 오산-평택-천안-조치원으로 이어지는 1번 국도 구간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키는 작전을 펼쳤지만 7월 16일 금강방어선이 붕괴되고 말았다. 

그러자 미 24사단은 제34연대를 중심으로 갑천변에 대전방어선을 구축하고 군수 물자기지로 쓰던 대전비행장을 전방지휘소로 활용하며 방어진을 쳤지만 적의 포위망 속에 빠져 고전 끝에 7월 20일 오후부터 철수를 시작했다. 미 제24사단은 4000여 명의 참전자 중 약 1000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미국 전쟁 역사 상 처음으로 전투 중 사단장이 실종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대전전투에서 미군은 지연 임무를 수행해 미 제1기병사단이 충북 영동 일대에 투입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데 기여했다. 대전지구전투호국영웅비에는 7월 17일~20일까지 대전지구 전투에 참가해 싸우다 산화한 81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중구 중촌동에 위치한 옛 대전형무소 망루
중구 중촌동에 위치한 옛 대전형무소 망루
옛 대전형무소 망루.
옛 대전형무소 망루.

◇대전형무소 망루와 우물 가슴 아픈 역사 증언 
중구 중촌동 자유총연맹대전시지부 건물 주변에는 전란 중에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대전형무소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일제가 독립운동에 참여한 많은 한국인을 수용하기 위해 1919년 5월 건립한 대전형무소는 안창호, 여운형, 김창숙 등 많은 애국자들을 투옥했다. 한국전쟁 직전 대전형무소에는 약 240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1948년 10월에 발생한 여순사건 관련자를 포함해 약 4000여 명의 수용자가 있었다.

한국전쟁이 나자 6월과 7월 수감돼 있던 많은 좌익 재소자들이 군인과 경찰에 의해 산내 골령골로 끌려가 처형됐다. 또 9월에는 퇴각하던 인민군이 형무소의 우익 수감자들을 처형했고, 심지어 일부 시신을 우물에 던져 넣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헌병과 경찰에 의해 한국전쟁 중에는 군경과 인민군에 의해 탄압과 학살이 자행된 곳이다. 현재 이곳에는 망루와 우물, 왕버드나무 등이 남아 가슴 아픈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옛 대전형무소에 있던 우물.
옛 대전형무소에 있던 우물.

옛 대전형무소의 망루(감시탑)는 모두 7개가 있었다. 망루 형태도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기, 근대에 따라 다른 형태로 만들어졌지만 1984년 대전교도소가 이전되면서 모두 철거되고 1개의 망루만이 남아 있다. 

대전형무소는 건립 당시 수도시설이 없어 식수를 위해  취사장에 2개, 목공장과 세탁공장에 1개씩 모두 4개의 우물을 만들었다. 이 우물들은 한국전쟁 당시 수감자들의 학살 장소로 사용돼 취사장 우물에서는 171구의 시신이 인양됐다. 현재 남아 있는 우물은 취사장 부근의 우물로 추정되고 있다. 

 

동구 낭월동에 있는 산내 곤룡골 표지석
동구 낭월동에 있는 산내 곤룡골 표지석
산내 곤룡골에는 8개의 암매장지가 있어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으로 불린다.
산내 곤룡골에는 8개의 암매장지가 있어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으로 불린다.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산내 곤룡골
동구 낭월동의 한 교회 옆 공터는 민간인 대량 학살이 자행된 곳이다. 이른바 산내 곤룡골로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대전형무소 재소자, 국민보도연맹 등 1800명~7000여 명이 이곳에서 영문도 모른 채 숨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99년 12월 말 공개된 미국 비밀문서에 따르면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정치범 1800여 명이 3일 동안 집단 총살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과정에서 정치범 외에 민간인도 끌려와 총살됐으며, 증언에 따르면 곤룡골에 암매장지가 8곳에 달한다고 해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으로 불린다. 

대전산내학살사건 70주년을 맞아 오는 27일 오후 2시부터 제21차 희생자 합동위령제가 엄수된다. 동구는 진실화해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국비 402억 원을 들여 오는 2024년 말 준공 목표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전국단위 위령시설을 조성할 예정이다.  

 

제21차 희생자 합동추모제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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