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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한의 직언직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날
[윤기한의 직언직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날
  • 윤기한 논설고문
  • 승인 2020.06.26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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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헤럴드=윤기한 논설고문]

벌써 70년이 지났다. 어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이다. 6·25사변이 터진 날이다. “어찌 잊으랴 그날”이다. 흔히 동족상잔의 비극이라고 일컫는 날이다. 때로는 한국전쟁(Korean War)으로까지 호칭되는 이 사변은 정녕 전쟁치고는 가장 악랄한 것이었다. 김일성이가 소련을 등에 업고 저지른 참극이었던 것이다. 사흘이면 남한을 해방시키겠다고 호언장담한 비극이었다. 단일민족, 백의민족을 앞세워 민족의 단결과 평화를 외치던 남북이 싸움박질을 하게 된 것이다.

그날 나는 대전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새벽 4시면 세민숙의 숙장님과 숙생들이 보문산에 올라갔다. 시루봉이 목적지이다. 그 봉우리는 우리가 붙여준 이름이 청수봉이다. 보문산의 최고 정상이다. 세민숙은 오류동 한 가운데에 위치한 벽돌공장 사무실에 여남은 학생들이 매일 밤 모여 공부하던 학당이다. 마치 일본의 쇼까손주꾸(松下村塾)같은 사숙(私塾)이었다. 등산을 마치고 한낮이 되어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놀라고 말았다. 전쟁이 났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서울의 함락과 더불어 피난행렬이 길어지는 참에 이승만 대통령이 충남도청에 임시수도 정부를 차렸다. 금강방어선을 설치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도무지 알 수 없는 판국이 돼버린 채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혼란과 혼돈의 세상으로 바뀌었다. 하필이면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태평세월을 누리던 참이었다. 난데없는 전쟁은 모든 걸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말았다.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운명의 장난이 시작된 것으로 느껴졌다.
우리 집에서도 피난을 가자고 나섰다. 지금의 안영동 너머 냇가 동네 지량리의 이장댁으로 식구들이 몰려갔다. 방 하나를 빌려 얼마 되지 않은 짐 꾸러미를 내려놓았다. 금방 내 집으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한 아버지는 동네에서 벌인 쇠고기 잔치를 흠뻑 즐기셨다. 황소 한 마리를 잡아서 저녁에 여러 집 사람이 모여 한바탕 먹기 자랑을 한 셈이다. 난리 통에 마구잡이식으로 해댄 무법천지 행사였다.

이때에 내가 일찍부터 써온 일기장이 몽땅 불쏘시개로 타버렸다. 어른들의 성화에 못 이겨 빼앗긴 일기장이 아쉬워 잠시 소동을 피웠다. 그랬더니 인천에서 도망해온 경찰이 냇가에 진을 치고 있는 터에 박박 깎은 머리의 학생을 인민군으로 착각하고 나를 붙잡아 심문하는 것이었다. 마침 학생증을 챙겨오지 않은 탓으로 그들의 오해를 풀기에 힘들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우리 집에 남아 있는 물건들을 챙기기 위해 다시 집으로 돌아가 계셨다. 어린 나는 엄청난 수모를 겪었다. 구타와 협박으로 어린 가슴이 메어지는 기분이었다.

보수성이 강한 아버지는 부산으로 피난 가자는 친구들의 권유도 듣지 않으셨다. 자기 판단에 늘 자신감을 펼치신 아버지의 고집이 남행열차를 거절했던 것이다. 전쟁이 오래 가지 못 할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셨던 모양이다. 대전역 전 시가지가 불타버리고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전쟁은 치열했다. 그래도 일단 대전 근처는 지나간 자리라서 조용해졌다. 우리 식구는 집으로 돌아왔다. 내 집에 안착하니 전쟁을 잠시나마 잊을 만 했다.
달빛이 환한 밤에 뒷마루에 식구들이 모여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전쟁의 고통이 최대의 혐오사건으로 이런 저런 잡담을 하고 있는 참이었다. 난데없이 사립문 쪽으로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따콩총과 따발총을 둘러 맨 청장년들이다. 맨 앞에는 아버지 친구의 아들이 총으로 아버지를 겨누며 걸어 들어왔다. 그 바로 뒤에 어리디 어린 인민군이 따랐다. 여섯 놈의 불한당이 다짜고짜 아버지를 마루에서 끌어내려 밖으로 데려갔다. 전봇대에 늘어져 있는 전깃줄을 끊어 아버지를 둘둘 동여매는 것이었다. 총을 겨누고 있는 일당들에게 둘러싸였다.

내 눈에 불이 번쩍이는 순간이 지나갔다. 인민군은 서대전 역전에 있는 인민파출소 소장이라고 하기에 내가 덤벼들었다. “동무, 인민공화국 헌법에 이렇게 해도 된답디까?”하고 소리 질렀다. 무색해진 소장이란 놈이 내말에 되레 놀란 게 틀림없다. 그러자 이놈이 옆구리에 차고 있는 권총을 뽑아들었다. 내 배에 들이대고 내뱉는다. “이 간나 새끼가!” 내 대꾸는 “그래 이 동무야. 쏴봐, 쏴!”였다. 내 만용은 허무맹랑하지만 그만한 배짱은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얼마나 갓잖게 보였으면 내가 덤벼들었을 것인가.

마침 우리 식구는 더위에 시달리다 런닝셔츠와 팬티만 입고 있던 참이었다. 일당은 아버지에게 지주로 소작인에게 악랄했지 않느냐고 다그쳐 물었다. 그 패거리 중에 바로 소작인의 아들이라는 작자가 끼어 있었던 모양이다. 무턱대고 그놈들은 아버지의 출생지인 유성 반석동(지족리)으로 가자고 욱박지른다. 그러고는 마구 잡아 끌어가는 것이었다. 무리지어 행동하는 빨갱이 똘마니들의 행패가 너무나도 악질적이고 포악했다.

나는 그 즉시 시내로 뜀박질을 했다. 대전 중부 경찰서 뒤편에 있는 2층 건물에 주재중인 당시의 충남도 검찰총장이라는 사람을 찾아 나선 것이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초등학교를 겨우 나온 동네 형뻘 되는 사람이 거창한 직함을 가지고 이북에서 내려와 나를 만나고 간 적이 있었기 때문에 구원을 요청하러 간 것이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대천으로 출장 중이란다. 맥없이 터벅터벅 걸어 들어온 집은 태평했다. 아버지가 돌아와 계셨다. 나는 다시금 놀랐다.

전깃줄로 묶여서 끌려가던 아버지는 수침교에서 다리 보수작업에 동원 된 동네 사람들이 덤벼들어 변호하고 욱박질러서 일단 풀려나오신 것이란다. 허나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다시 패거리가 되돌아와 아버지를 재차 납치했다. 유성 만년교를 지나 전 국군휴양소 자리인 계룡스파텔로 통하는 길 입구의 외딴집 주막에서 쉬어간다고 머문 틈에 아버지는 대변을 보고 싶다고 꾀를 내어 나락 논 속으로 숨어들어 도망쳐 나와 지금의 문화초등학교 근처 굴속에 숨어 위기를 면하셨다.

그런 와중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어 북진의 기개가 올랐다. 내가 살던 서대전 철뚝거리의 젊은이들 대부분이 의용군이라는 명목으로 끌려 나가 아까운 목숨을 버린 사변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비극에 휘말리지 않았다. 이 참담한 민족의 수난과정은 나만이 받은 고통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먼 길 피난을 하지 못 한 탓에 받은 우리 부자의 수난은 도저히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되었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어야 하건만 여전히 김정은의 노예독재집단은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그러니 잊지 말자 6·25 참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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