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연휴  마지막 날인 18

조근호 전 법무연수원장(행복마루 대표변호사)
조근호 전 법무연수원장(행복마루 대표변호사)

딸아이의 제안으로 만화영화 코코를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이 나이에 만화영화가 웬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딸아이가 너무 재미있다며 강권하는 통에 보게 되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면서 가족 모두 정말 재미있고 잘 만들었다는 찬사를 하였습니다.

코코는 멕시코의 전통문화 '망자의 날'을 모티브로 삼은 영화입니다. 코코의 주인공 소년 미구엘의 집안은 신발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데는 사연이 있습니다. 미구엘의 고조할아버지 델라 크루즈는 음악 때문에 가족을 버린 사람입니다. 그 후 델라 크루즈의 아내이자 미구엘의 고조할머니는 생계를 위해 신발업에 투신하였고 성공하여 가업이 됩니다. 그 후 이 집안에서는 아무도 음악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고조할아버지의 가족에 대한 배신을 떠올리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미구엘에는 고조할아버지의 피가 흘러 음악적 재능이 있습니다. 미구엘은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멕시코의 축제 [망자의 날]에 열리는 음악경연대회에 참가하기로 합니다. 기타는 할머니 손에 박살 나고, 대신 고조할아버지 델라크루즈의 봉안당에 전시된 그의 기타를 훔치기로 합니다. 막 훔치려는 순간 봉안당 관리자에게 걸려 그대로 잡혀갈 위기에 몰립니다. 이때 조상의 보호를 받았는지 미구엘은 사후세계로 들어서고 관리자 눈에 보이지 않게 됩니다.

멕시코 사람들이 생각하고 디즈니가 만든 사후세계는 어떻게 생겼을까요.

서양 문학에서는 사후세계 방문에 대한 계보가 있습니다. 호메로스가 쓴 [오딧세이아]에 등장하는 사후세계에 대한 방문이 그 첫 번째입니다. 몇 년째 유랑생활을 하는데 지친 오딧세우스는 귀향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알고 싶어 합니다. 키케르는 그를 지하세계로 안내합니다. 오딧세우스는 지상세계와 지하세계를 가르는 아케론 강기슭의 바위에 서서 수많은 혼령들을 만납니다.

그곳에서 문학 사상 유명한 대사가 나오는 아킬레우스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합니다. 오딧세우스는 아킬레우스에게 "살아 있을 때도 그리스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더니 죽어서도 죽은 자들을 통치하는 제왕이 되었으니 행복하겠다."고 그를 치켜세웁니다. 그러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오딧세우스여. 나를 위로하려 하시지 마시오. 나는 죽어 사자들의 나라를 통치하느니 차라리 시골에서 농토도 별로 없는 소작농의 머슴으로 살고 싶소."

오딧세우스의 사후세계 방문 이야기는 훗날 로마의 서사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로마의 건국자에 대한 이야기 [아이네이스]를 쓸 때 다시 등장합니다. 아이네이스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어떻게 하여야 할지 알기 위해 시빌레 여신의 안내로 지하세계에 있는 아버지 앙키세스를 방문하러 갑니다. 스틱스 강을 건너 사후세계로 간 아이네이스는 몇 개의 들판을 지나 두 갈래 길에 당도합니다. 왼쪽은 지하감옥인 타르타로스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극락세계인 엘리시온으로 가는 길입니다. 지옥과 천국인 것입니다.

서양 문학사의 유명한 세 번째 사후세계 방문은 단테의 신곡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단테는 "내 인생 최전성기에 문득 뒤를 돌아다보니 어두운 숲속에서 길을 잃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고 회고한 후 스승의 인도하에 비밀의 장소, 지하세계로 들어섭니다. 그 스승이 아이네이스를 쓴 베르길리우스입니다. 뱃사공 카론의 배를 타고 스틱스 강을 건넌 단테를 지옥, 연옥, 천국 순으로 지하세계를 여행합니다. 단테는 먼저 지옥으로 들어섭니다. 그 지옥문에는 유명한 구절이 적혀 있습니다. "여기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단테에 의해 묘사된 지하세계는 일련의 맥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지상세계 사람은 특별한 경우 지하세계를 방문하기도 한다. 둘째 지상세계와 지하세계는 강으로 끊어져 있다. 셋째 일단 지하세계에 간 사람은 다시 지상세계로 돌아오지 못한다. 이것이 서양 문학이 그리고 있는 사후세계에 대한 세계관입니다. 대체적으로 음침하고 우울하며 공포스럽습니다.

그러나 영화 코코에서 그리는 사후세계는 이와 전혀 다릅니다. 적어도 영화 코코가 그리는 사후세계에는 천국도 지옥도 없습니다. 모두가 즐겁게 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1년에 단 3일, 10월 31일부터 11월 2일까지 [산 자의 세상]과 [죽은 자의 세상]을 이어주는 마리골드 꽃잎으로 만든 다리를 건너 살아 있는 가족을 찾아갑니다. 비록 살아 있는 가족들은 그들을 볼 수 없지만 죽은 자들은 그 날만큼은 산 자들을 보고 즐겁게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데 여기에 규칙이 있습니다. 죽은 자가 산 자의 세상으로 오기 위해서는 검문소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 검문소에서는 죽은 자의 사진을 유족들이 제단에 올려놓았는지를 검사합니다. 즉, 산 자의 기억 속에 죽은 자가 남아 있어야 검문소를 통과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진이 통행증이지요. 사진도 없고 산 자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면 죽은 자는 스스로 불타 없어집니다. 진정 죽음을 맞는 것입니다. 멕시코 사람들은 죽음을 2단계로 사유하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죽음은 육체의 소멸이고 두 번째 죽음은 산 자의 기억 속에서의 소멸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더 무서운 죽음은 두 번째 죽음일 것 같습니다. 더 이상 누구의 기억 속에도 남아 있지 않는 삶, 사실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하였는지 아무런 흔적이 없는 삶.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죽음이겠지요. 이 점에서 서양 사람들의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과 멕시코 사람들의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은 확 갈리는 것 같습니다.

저는 언뜻언뜻 이승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 말고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멕시코식으로는 죽어서 이름을 남기지 않으면, 즉,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으면 결국 2번째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저는 멕시코식 설명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제가 왜 가족에게, 친지에게, 사회에게 선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잠정적 해답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가 그들의 기억 속에 남아 2번째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논리라면 충분히 다른 사람들 기억 속에 좋은 사람으로 남을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설날 연휴를 마치며 저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기억하고 있는지, 저는 얼마나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저작권자 © 충청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