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한국 근대정치사의 한 획을 그은, 좁게는 충청의 거목이다.
그의 생애 내내, 특히 1950년 6.5 한국전쟁 이후 김 전 총리의 굴곡진 삶과 영욕의 세월로 그를 정치 풍운아, 제 2인자, 보수의 대명사로 지칭됐다.
지난 1926년 충남 부여에서 규암면장인 고 김상배씨에서 태어난 김 전 총리는 공주중·고등학교, 서울대 사범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이어 1963년 공화당 창당을 주도하고, 초대 중앙정보부장과 그해 열린 제6대 총선에서 당선된 뒤 7·8·9·10·13·14·15·16대를 거치며 9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또 신민주공화당과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총재를 지낸 김 전 국무총리는 박정희 정권·김대중 정부 시절 두 차례 국무총리를 지냈다.
김 전 총리 일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김 전 총리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본부로 배속됐을 때부터 시작된다. 육군본부 정보장교로 배정된 김 전 총리는 당시 전투정보과 상황실장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 전투정보과장이었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등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인연으로 김 전 총리는 서울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박영옥 여사와 결혼한다. 2015년 세상을 떠난 박영옥 여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형 박상희씨의 딸로 박 전 대통령의 친 조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인척 관계로 묶인 김 전 총리를 이름을 부르기보다 `임자`라고 부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김 전 총리는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들어선 제2공화국 장면 내각 시절 `정군운동`을 벌이다가 항명 파동으로 강제 전역됐다.
예비역 중령 신분으로 5·16 쿠데타의 핵심적 역할을 맡았고, 이후 예비역 육군준장으로 특진했다. 군사정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오른팔` 격으로 실세로 군림한 김 전 총리는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 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군사정부의 민정 이양이 결정되자 김 전 총리는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계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라이벌들의 견제로 여러차례 장기간 외유를 떠나기도 했던 김 전 총리는 `특명전권대사` 직함으로 1년 넘게 외국을 다니며 수교협상 임무를 맡기도 했다.
1964년 일본 오히라 마사요시 외상과 막후교섭으로 한일협정 성립에 큰 역할을 했고, 당시 작성된 `오히라-김종필 메모`는 한일협정의 초안이 됐지만 김 전 총리는 메모 파동으로 6·3사태가 일어나자 다시 외유를 떠나기도 했다.
`김종필-오히라 메모`로 체결된 한일협정과 관련해 `한국과 일본 사이 일제강점기에 대한 모든 것을 없었던 것`으로 하는 한일기본조약 때문에 일본측의 명확한 사과를 받아내지 못하는 점은 지금도 비난을 받고 있다. 여기에 배상금 액수조차 `헐값`이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이처럼 그에게는 창당 초부터 시련이 연속됐다. 공화당 창당 과정에서 증권파동을 비롯한 이른바 '4대 의혹사건'에 휘말리면서 1963년 2월 '자의반 타의반' 첫 외유를 떠난 데 이어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의 주역으로서 핵심쟁점이던 대일 청구권 문제와 관련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으로 6·3사태가 일어나자 1964년 또다시 2차 외유길에 올랐다.
이후 1971년부터 1975년까지 4년 6개월 간 국무총리를 지내며 승승장구했으나, 1980년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몰려 영어의 몸이 되기도 했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김 전 총리는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빠른 시일 내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합의했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에 의해 정치 활동이 금지당했다.
김 전 총리는 1984년 미국으로 건너가 유랑생활을 하다 1986년 귀국한 뒤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1987년 13대 대선에 출마해다가 낙선했다. 그러나 1988년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충청권을 기반으로 35석의 국회의원을 확보하는 데 성공, 오뚝이처럼 정치 일선에 복귀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는 현실 정치에 복귀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대선에 출마했지만 야권 후보단일화 실패로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면서 4위에 머물렀다.
이후 1990년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 전총재가 이끄는 3당 합당의 주역으로 평가가 극과 극인 사태를 맞는다.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을 도와 문민정부를 세웠다가 결별했다.
그는 '대전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YS와 결별하고 신당(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겠다고 밝히며 충청도 핫바지론을 내세워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앞승한 뒤 이들해인 1996년 제 14대 총선에서 54석을 얻어 위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된 제15대 대선에서는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손을 잡은 이른바 `DJP연합`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 당선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한나라당 경선에 불복한 민주신당 이인제 후보가 맞붙어 김대중 후보가 이겼다.
DJP 연합의 성공으로 당시 자민련 총재였던 김 전 총리는 국무총리에 올라 공동 정부 한 축을 맡았다.
DJP 연합은 내각제 개헌 이행 여부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에 대한 의견 차이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북 유화책에 이견을 보인 자민련이 2001년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안에 가담하면서 DJP 연합은 최종적으로 무너졌고,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정국 역풍 속에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자민련이 국회의원 4명 배출에 그치면서 김 전 총리도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정치적 행보를 보이지 않다가 2016년 대선을 준비하던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에게 "내가 비록 힘은 없지만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돕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