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출신 여당 대표 이해찬(66, 세종시) 의원. 그는 충남 청양군 청양면(현 청양읍)에서 아버지 이인용과 어머니 박양순 슬하 5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덕흥대원군이다.

충청도에서 배출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대표 이해찬의원은 충남 청양군 청양면(현 청양읍)에서 광복후 면장을 지낸 이인용의 5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그의 조상은 덕흥대원군이다. 7선까지의 선거포스터[사진=충청헤럴드DB.이의원 페이스북켑처]
충청도에서 배출된 여당 대표 이해찬 의원은 충남 청양군 청양면(현 청양읍)에서 광복후 면장을 지낸 이인용의 5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덕흥대원군이다. 7선까지의 선거포스터 [사진=충청헤럴드DB.이 의원 페이스북 켑처]

여러 정치인들이 어린시절 가난하게 자란 것과 달리 이해찬은 비교적 곤궁함 없이 보냈다. 부친인 이인용 씨가 청양면 면장 출신이었던 까닭이다.

26일 <충청헤럴드>가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신임 대표의 고향인 청양읍 주민들에게 물었더니, 그의 부모와 조상에 대해 "정말 훌륭했던 분", "축덕(蓄德)했던 분들", "올곧은 선비", "덕망이 있는 분" 등의 극찬이 쏟아졌다.

그 중 청양읍 김 모(88)씨는 "청양에서 이 면장님의 인품을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만큼 덕을 많이 쌓으셨다. 이 면장님 뿐만 아니라 사모님도 인정이 많고 따뜻하신 분"이라며 "이해찬 의원에 대해서는 대충은 알고 있지만 군사정부 때 곤욕을 치른 천재라고 들었다"고 말했다.

또 이 모(90)씨도 "이 면장님을 닮았다면 그 분(이해찬 의원)이야 말로 나라 지도자 감"이라면서 "우리 동네에서 여당 총재(당대표)가 나온 것은 경사"라고 반겼다.

이 신임대표 지역구인 세종지역의 한 주민(44. 커피숍 운영)도 이날 "이해찬 의원이야 말로 인상과 달리 매우 따뜻하고 부드러운 분"이라며 "소탈하고 앞에 잘 나서지 않는 분인데 여당 대표가 됐다니 기대된다. 여당은 정치권의 앞에서 설 때보다 뒤에서 국민을 보듬고 돌봐야하는 것 아니냐"고 바람을 전했다. 

충남 청양군청 전경[사진=연합뉴스]
충남 청양군청 전경 [사진=연합뉴스]

이해찬 대표의 부친은 광복 후 32살의 나이로 청양면장을 맡아 4.19 혁명 때까지 면장을 지낼만큼 주민들에게 덕을 쌓았던 인물이다. 모친 역시 시골 청양의 굶주리는 사람, 못배운 사람을 가족처럼 돌본 성품이 알려져 있다.

그후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 즉 독재정권 말기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도 야당 후보로 나서 면장에 당선됐을 정도니 지역 주민들의 신망이 얼마나 투터웠는지 짐작이 간다.

이해찬은 일찍이 서울로 상경해 덕수중학교,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를 입학했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섬유공학과를 다녔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자퇴했다.

다음해 문리과대학 사회학과로 재입학했다. 그는 1년늦는 바람에 73학번이다. 정계에 입문하기 전까지는 주로 운동권에서 활동했다. 1972년 10월 유신을 계기로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온갖 고문후에 투옥되어 약 1년을 복역하고 출소했다.

이 사건 후 무역회사를 들어갔다. 이후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기자들이 차린 번역실에서 번역을 하기도 했다. 앰네스티 한국지부에서 일하는 등 재야 인사로 지냈다. 1979년에는 돌배개출판사를 창업했다.

그러다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제적이 되었다가 해금 조치되면서 1980년 복학하여 복학생협의회 회장을 맡았다. 이 때 이해찬과 유시민이 멱살잡이 싸움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1학년생들이 10일씩 가는 병영집체훈련 응소 문제를 두고 운동권 내부에서도 총학생회 측과 복학생협의회 사이에 의견이 달라 노선 싸움이 있었다.

1994년 제 14대 당원연수교육때 김대중총재와 이해찬의원{사진=nada5582님의 블로그켑처]
1994년 제 14대 당원연수교육때 김대중 총재와 이해찬 의원. [사진=nada5582님의 블로그 켑처]

이 문제에 대한 집회에서 총학생회 간부였던 유시민이 사회를 봤는데 복학생협의회 측에 발언권을 주지 않고 집회를 끝내려 하자 복학생협의회장이었던 이해찬이 달려들어 유시민의 멱살을 잡은 뒤 욕설을 했고 이어서 주먹을 날리려던 찰나에 사람들이 말려서 다행히 주먹다짐으로 번지진 않았다고 한다.

그 뒤로 둘은 화해를 했고 절친한 운동권 선후배 사이로 남게 됐다. 훗날 잘 알려졌다시피 이해찬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자 유시민을 보좌관으로 영입하게 된다.

이때 대전의 안양로 씨와 이철 전 국회의원을 만났다.​ 그해 80년 6월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돼 투옥됐다가 수감 2년 6개월 만에 크리스마스 특사로 석방된다. 이를 계기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치에 발을 디뎠다.

​출소 후 재야운동에 투신,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총무국장에 선출됐다. 군사 독재 정권은 그를 요시찰 인물로 삼아 감시했으나 굴하지 않고 반독재운동과 출판 활동 등에 종사했다.

그는 1985년 서울대에 입학한 지 14년 만에 졸업했다. 1987년 말에 한겨레신문 창간발기인을 지냈다. 학생 운동의 이력을 지니고 있던 이해찬은, 여러 재야 인사들과 함께 평화민주당에 입당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관악구을 지역구로 공천받아 민주정의당 김종인 후보와 통일민주당 김수한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1988년 금배지를 단 뒤 당이 다른 노무현, 이인제 의원 등과 5공청문회의 스타로 부상했다. 이후 5회 연속으로 관악을 국회의원 당선에 성공했고 세종시에서 19·20대 내리 당선 현재 7선 의원이다.

노태우 정부 시절 5공 청문회에서 5.18 민주화운동 당시 발포 사건과 녹화사업 등을 추궁해 주목을 받았다.

이어 1991년에 치뤄진 지방선거에 앞서 신민당을 탈퇴한 뒤 신동아 7월호에 인터뷰로 신민당을 두고 "공천을 돈받고 하는 걸 봤다. 이렇게 부패한 야당으론 정권을 교체 할 수 없다. 국민들은 김대중이 권력욕이 강하다고 생각한다"며 김대중을 비판하기도 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해찬 전 국무총리[사진=이해찬의원 페이스북켑처]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해찬 전 국무총리. [사진=이해찬 의원 페이스북 켑처]

YS의 문민정부 때 야당이었지만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 일했고 1997년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당시 후보의 선거대책본부 부본부장을 맡아 헌정 사상 최초의 평화적인 정권 교체에 공을 세웠다.

88년 등원 직후부터 5공청문회에서 통일민주당의 노무현, 이인제 의원과 함께 송곳 질의로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었다. 당내 활동에서는 DJP연합 당시 정책 공조 협상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면서 전략통으로 더 알려지게 된다. 국회를 출입하던 필자도 이해찬이 백분율이 소수점까지 딱 맞힌다는 소문을 들어 '선거의 제왕'이라 덕담도 건넸다.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의 건영 3차아파트에 살면서 관악고시촌에 광장이란 서적을 운영하기도 했다. 

한편 이해찬 신임 대표는 25일 오후 서울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린 민주당 전국대의원대회에서 42.88%를 득표해 당선됐다. 이로써 그의 지역구 공약인 세종시의 행정수도 완성과 지방분권, KTX세종역 신설 등에 탄력이 붙을지 주목된다.

25일 열린 서울 잠실 올림픽체육관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사진=lis0013불로그 켑처]
25일 열린 서울 잠실 올림픽체육관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사진=lis0013블로그 켑처]

그는 전체 투표의 45% 비중을 차지하는 대의원 현장투표에서 4800표(40.57%), 40% 비중의 권리당원 ARS 투표에서 12만2866표(45.79%), 10% 비중의 국민 여론조사에서 44.03%, 5% 비중의 일반당원 조사에서 38.20%를 얻었다. 

이 대표와 경선을 치른 송영길 의원은 30.73%, 김진표 의원은 26.39%를 득표해 각각 2, 3위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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