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0년대 탈북인사로 알려졌다가 재입북하려다 걸렸다며 위장 간첩혐의로 사형을 당해 세상의 화재가된 고(故) 이수근씨.

그러나 이같은 일은 중앙정보부의 조작이었고, 이 씨는 재심끝에 49년만에 누명을 벗었다.

한때 대한 뉘우스를 통해 이 씨가 수차례 탈북 사실을 홍보됐고, 반공영화까지 만들어졌던 이 씨의 판문점 탈북사건.

그러나 당국은 몇 해가지 않고 이 씨가 위장간첩이며, 다시 재입북하려다가 붙잡혔다고 대대적으로 선전에 이용된 인사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32부는 11일 지난 1969년 사형이 선고된 이 씨의 재심에서 반공법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공문서 위조 및 행사, 외국환거래법 위반 등 일부 혐의만 유죄로 인정해 징역 2년을 선고했다.

이수근 사건의 개요= 이 씨의 사건을 이렇다. 20년 동안 기자로 일하며 김일성 수행기자를 거쳐 국영통신사 부사장 자리까지 오른 북한 내 거물급 인사의 북한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이던 이수근씨.

이 씨는 1967년 3월 22일 판문점에서 군사정전회의를 취재하던 북한 언론인이 유엔군 승용차에 기습적으로 몸을 싣고 한국으로 귀순했다.

한국 정부는 그를 대대적으로 그를 환영했다.

김일성 수행기자 출신의 고위급 인사인 이수근 씨의 귀순은 북한과 사상, 경제 등 모든 측면에서 대립과 경쟁의 관계에 있었던 박정희 정권에게 체제 우위를 나타낼 호재로 다가왔다.

이 씨가 언론인 출신인 만큼 최근의 북한 사정을 잘 알 것도 분명했다. 이에 이 씨를 중앙정보부 1급 판단관으로 채용했고, 남한 정착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여야도 각각 환영 담화를 발표하며 이 씨의 귀순을 반겼다. 한국 정부는 그의 귀순과 관련해 판문점 유엔 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 소장에는 2등 근무공로훈장 수여를 결정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이 씨도 언론과의 인터뷰와 대국민 반공 강연 등 대중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아울러 한국의 대학 교수와도 결혼해 남한 생활에 잘 적응하는 듯 보였다

사진은 그해 4월 10일 서울 중구 장충동 장충단공원에서 열린 서울시민환영대회에서 영화배우 최은희(왼쪽)와 악수하고 있는 이수근(오른쪽)의 모습. 가운데는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김현옥 씨.[사진=대한 늬우스켑처]
사진은 그해 4월 10일 서울 중구 장충동 장충단공원에서 열린 서울시민환영대회에서 영화배우 최은희(왼쪽)와 악수하고 있는 이수근(오른쪽)의 모습. 가운데는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김현옥 씨.[사진=대한 늬우스켑처]

이 씨,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그러나 이 씨는 1969년 1월 위조여권을 만들어 홍콩으로 탈출, 캄보디아로 향하다 베트남 떤선공항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체포돼 서울로 압송됐다.

그리고 그해 5월 간첩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7월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베트남에서 압송되어오는 이수근씨[사진=당시 언론사들에 배포한 공보처사진]
베트남에서 압송되어오는 이수근씨[사진=당시 언론사들에 배포한 공보처 사진]

당시 발표는 위장 귀순해 북한의 군사적 목적을 위해 기밀을 수집하는 등 간첩 행위를 한 뒤 한국을 탈출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그는 같은 해 5월 사형을 선고 받았고, 2개월뒤인 7월 사형이 집행됐다는 것이었다.

당시 이 씨 주장= 이 씨는 중앙정보부의 지나친 감시에 남한으로의 귀순에 환멸을 느꼈다. 북한에 있는 가족의 안위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 씨는 중립국으로의 망명을 택하고 한국을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지난 1969년 2월13일자 경향신문
지난 1969년 2월13일자 경향신문

이 씨는 북에 있던 아내의 조카인 배경옥 씨와 함께 여권을 위조해 출국했다. 이들은 홍콩을 거쳐 캄보디아로 향하던 중 베트남 사이공 공항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체포돼 한국 군용기 편으로 압송됐다.

이의제기와 재심= 그렇지만 지난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당시 이수근 씨 등을 불법 체포 및 감금하고 가혹한 고문 행위를 했다"며 "위장 귀순이라 볼 근거가 없다"고 발표해 이의를 제기했다.

또 재판 당일에도 중정 요원들이 위압적 분위기를 조성할 만큼 당시 법정 진술도 강요된 것으로 의심할 만하다고 봤다.

재판부도 이 씨가 영장 없이 불법으로 구금됐고, 수사관들의 강요로 허위자백을 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1969년 3월 22일, 5월 10일, 7월 3일자 경향신문(왼쪽부터).
1969년 3월 22일, 5월 10일, 7월 3일자 경향신문(왼쪽부터).

이어 "지령을 받기 위해 한국을 탈출했다기보다는, 처음 이 씨가 진술했던 대로 너무 위장 간첩으로 자신을 몰아붙이자 중립국으로 가서 편히 지내며 저술 활동을 하려 했던 것 아닌가 생각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방어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채 위장 귀순한 간첩으로 낙인 찍히고 생명까지 박탈당하는 데 이르렀다"며 "권위주의 시대에 국가가 저지른 과오에 대해 피고인과 유가족에게 진정으로 용서를 구할 때"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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