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은 군사 반란으로 전두환(全斗煥) 정권이 들어선 1979년 12월 12일 사태다. 전두환 신군부는 이 사태 등에 항의, 광주 민주화운동에 나선 광주시민 항쟁을 무력으로 짓밟는 만행을 저지른 뒤 정권을 탈취했다.

사태는 이렇다. 1979년 10월 26일 밤 대통령 안가인 궁정동 만찬 석상에서 중앙 정보부장 김재규가 18년 집권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사살하면서 비롯됐다.

필자의 경우 충남대 학군단 116 ROTC 후보생으로 곧 소위 임관을 앞둔 상황이었다. 그해 대전 공설운동장에서는 제60회 갑년 전국 체육대회가 열렸고, 필자는 그해 10월 29일 소위 임관을 위한 ROTC 교육 사열(점검)을 앞두고 있었다.

이 사태로 12.12 사태로 충남대를 비롯한 전국 7개 국립대 등이 모든 대학이 문교부 장관과 대학교 총장, 학군단장 명의로 무기한 휴교령과 모든 회합을 금지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보병 32사단을 비롯 전군에 비상계엄과 함께 비상출동 대기 상태가 지속됐다.

1979년 정권을 잡기위해 전두환 신군부가 그해 12월 12일 새벽 계엄사령관이자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대장등을 불법연행한 12.12사태. 오른 쪽은 당시 정대장의 연행되는 모습과 10.26 박정희 전대통령 시해사건에 정대장이 연루됐다는 전두환 합수부장의 발표장면[사진=충청헤럴드 DB]
1979년 정권을 잡기위해 전두환 신군부가 그해 12월 12일 새벽 계엄사령관이자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대장등을 불법연행한 12.12사태. 오른 쪽은 당시 정대장의 연행되는 모습과 10.26 박정희 전대통령 시해사건에 정대장이 연루됐다는 전두환 합수부장의 발표장면[사진=충청헤럴드 DB]

서거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해 11월 4일 영결식이 치러졌다.

이어 최규하(崔圭夏)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았다. 또, 정승화(鄭昇和) 대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전두환 보안 사령관이 10.26 사태 합동수사본부장을 앉혔다.

이런 와중에 육사 11기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12기 박준병 그룹이 1979년 12월 12일 노재헌 국방장관과 최규하 대통령의 사전 재가 없이 당시 계엄사령관 정승화(鄭昇和) 대장 등 군 수뇌부를 불법적으로 연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군부의 유혈(流血) 사태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비롯 정병주 특수전 사령관, 그리고 장태완 수도경비 사령관을 체포했으며, 이를 통해 군부를 장악했다. 어디까지나 불법이다.

이 12.12 사건은 김영삼(金泳三) 정부 때 대법원이 확정 판결한 대로 ‘군사 반란’으로 규정됐다.

전두환 측은 당시 12.12 사태를 법적으로 변호해 큰 반발을 샀다. 전두환 측은 구질서를 무너뜨리고 새 헌정질서를 창출하는 혁명의 논리로 12.12 사건을 변호했다.

전두환은 지난해 출판된 '전두환 회고록'에서 12·12 사태에 대해 "김재규 내란에 동조한 혐의가 명백한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조사하고자 연행하던 중 발생한 우발적 사건"이라고 강변했다. 이는 권력을 잡기 위한 하극상 반란이라는 법원의 판결을 부정했다.

그는 또 "(1979년) 10월 27일 새벽 국무회의가 계엄사령관이 될 수 없는 사람,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을 계엄사령관에 임명함으로써 12·12는 피해 갈 수 없는 일이 됐다"라면서 반란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그들이 당시에 그런 혁명 선언을 하지 않았으므로 이 또한 불가능하다.

특히 전두환 그룹이 정승화 대장 연행의 이유로 내세웠던 혐의들도 그들이 주도한 수사, 재판 과정에서조차 증명되지 못하였다.

전두환은 정 대장이 박정희 시해 사건에 연루됐다고 조작 발표했다.

12.12 사건 후 군부의 실세가 된 전두환 그룹은 1980년 5월 5.17 계엄 확대 조치로써 정권까지 장악했다. 5.17 계엄에 항거한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강경 진압했다. 그리고 자신도 8월 22일 단숨에 대잔으로 예편한 뒤 그해 9월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최규하 대통령을 밀어내고 전두환을 새 대통령으로 추대, 헌법을 개정하여 제5공화국을 출범시킨 것이다. 5.17 계엄 확대 조치 과정에서 신군부는 국회를 군 병력으로 봉쇄하여 ‘계엄 해제 결의’를 못하게 하였다.
이는 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주권기관을 무력화시킨 명백한 쿠데타이다.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는 또 전두환이 정권을 잡는데 방해가 될 만한 김영삼(YS), 김대중(DJ), 김종필(JP) 씨 등 3김 씨를 강제로 정계에서 배제하였다.

연전에 방송된 '5 공화국'이란 TV 드라마에서도 이를 자세히 구성하고 있다.

전두환 그룹은 혁명이나 쿠데타를 선언하고 정권을 잡은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합법을 가장하였다. 최규하 대통령은 그런 합법 위장을 위하여 필요한 장치였고, 도구였다.

최 대통령은 정승화 연행을 불법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사태가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사후 재가를 하였다.

그는 전두환 그룹이 군부를 앞세워 제기한 5.17 전국 계엄 확대 조치, 정치인 숙청, 행정부를 무력화시킨 국보위 설치안도 재가하여 형식적인 합법성을 부여하였다.

전두환 그룹은 최규하 대통령의 효용 가치가 없어지자 김정열 씨(전두환 시절에 총리 역임)를 통하여 사퇴를 권유하였다. 최규하와 김정열은 막역한 친구 사이다.

지난 1997년 재향군인회가 발간한 `12.12 진상'과 `12.12, 5.18 실록'이란 백서에는 12.12 군사 반란을 진압하지 못한데 대한 원인 분석 부분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 분석에 따르면 ▲군 통수권자이자 국헌 수호의 책무가 있는 최규하 당시 대통령의 우유부단 ▲반란 진압 부대의 출동을 제지하면서 지휘 체제상에 혼선을 빚은 노재현 국방장관의 부당행위 ▲장성들의 기회주의적 성향 ▲쿠데타 군과의 유혈 충돌이 없도록 타협하겠다는 육본 수뇌부의 미온적이고 불합리한 태도 ▲반란군인 보안사의 통신 도청과 각급 부대에 파견된 보안부대 요원들의 정보보고 차단 실패 등이 진압 실패의 요인이라고 꼬집었다.

정치인, 그중에도 3김 씨는 어땠나. 10.26 사건 이후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 여론이 대세였다. 당연히 3김 씨가 단합하여 민주화를 약속한 최규하 대통령 체제를 뒷받침하고 개헌 작업을 주도하면서 전두환·노태우 그룹의 등장에 대비하였더라면 신군부의 집권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김종필만 하더라도 박정희의 유신 체제를 비판적으로 언급하면서 박정희 친위세력인 신군부와 멀어졌다. 김영삼-김대중은 대권이 눈앞에 있다고 착각, 서로 분열상을 빚었다.

김대중은 학생 및 재야와 손잡는 모습으로 군부를 자극했다. 최규하 대통령까지 과도 정부 역할을 넘어서는 과욕을 보이기도 하였다.

제2차 오일 쇼크로 경제난이 심화되는 가운데 정치 불안과 사회불안이 동시에 덮치자 중산층의 민심은 민주화보다 안정을 더 우선하는  쪽으로 변했다.

그러니 전두환 신군부는 단결된 군부를 통해 중산층과 분리된 민주화 운동 세력을 제거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전두환은 10.26 사건으로 발생한 권력의 진공상태에서 정규 육사 출신 장교단, 그 핵심인 하나회, 그리고 국군 보안 사령관이란 직책의 전면적인 지원을 받았다. 이들 세력은 집권 드라이브를 걸 수 있었다.

전두환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었던 3김 씨 외에 두 사람, 정승화와 최규하는 10.26 사건 날의 애매한 행적과 행동으로 의혹과 불신을 샀고 전두환은 이 약점을 십분 활용하였다.

당시 12.12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충청권의 한 인사는 12일 <충청헤럴드>와의 통화에서 "12.12 사건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정승화 연행이 계획대로 되지 않은 덕분으로 두 대통령이 생겼다는 점"이라며 "자연스러울 줄 알았던 연행작전이 전두환 측 공수부대가 총을 쏘면서 국방부와 육군본부와 수경사를 점거하는 군사 변란으로 변질되면서 그날 밤 전두환은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넜던 것이다. 살기 위하여서라도 정권을 잡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스스로 만든 것"이라고 회고했다.

인간은 살기 위하여 행동할 때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 법이라고 훗날 재판 과정에서 드러났다.

12.12 사건,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라는 유혈사태를 거치면서 출범한 전두환 정권은 재임기간 한국경제는 연평균 성장률이 10%를 넘어 세계 1등이었다. 물가도 잡고 무역흑자도 기록하였다. 이런 경제발전이 소란스러운 민주화 운동에 완충제 역할을 하였다. 그는 88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고, 6.29 선언을 결단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였다.

보수언론들은 "그가 퇴임할 때의 대한민국은 그가 취임할 때의 대한민국보다 훨씬 민주화되어 있었고, 경제도 튼튼해졌다. 그는 독재자로 취임하였으나 퇴임할 때는 민주화에 기여한 지도자로 변해 있었다."라고 평가해 극과 극의 시각을 보였다.

이후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한 뒤, 1995년 소급입법을 통하여 12.12 사건과 5.17 및 5.18 사건을 재수사하고 전두환. 노태우, 정호영 등을 법정에 세운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계엄사령관 직책에서 연행되어 보안사 수사관들로부터 엄청난 물고문을 당하였던 정승화 대장 등의 입장에선 속이 시원한 복수가 되었을 것이다. 이 역사의 단죄는 한국의 보수층을 분열시켜 1997년 김대중 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길을 열었다.

사태를 취재한 원로 언론인은 이날 <충청 해럴드>와의 통화에서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는 자세는 평가가 아니다. 평가는 쉽고 간단하다. 역사는 이야기여야 한다. 역사를 실록으로 정확하게 구성해놓으면 평가는 저절로 된다. 전두환이 옳았는가, 나빴는가의 논쟁보다는 왜 그가 집권할 수 있었느냐를 탐구하는 게 더 재미있고 유익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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