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존엄’이 먼저냐, ‘죽음의 위엄’이 먼저냐!
'세기의 미남'이라 불리던 프랑스 대표 배우 알랭 들롱이 88세의 나이로 지난달 18일 생을 마감했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가 안락사를 요청했다"라고 했다.
지금까지도 안락사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그 대상이 사람뿐만 아니라 반려동물이든 반려식물이든 마찬가지로 사람이 윤리적인 동물이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안락사는 ‘사랑이 담긴 행위’라는 것이다.
또한 사랑이 아닌 어떠한 계산적인 이유에서 안락사가 시도된다면 그것은 단순히 자살이나 살인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안락사는 그 행위가 고귀한 행위, 사랑의 행위가 되도록 사회 전반적으로 많은 검토와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사람은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지만 죽을 때는 순서가 없다"라는 말이 있다. 또 비슷한 말로 "사람은 스스로가 선택해서 태어날 수는 없지만, 죽음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라는 말도 있다. 그것은 우리의 죽음이 대부분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시간에, 그리고 선택하지 않은 방법으로 찾아오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고 싶어 한다. 물론 지금까지의 그 '고통 없는 죽음'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자연사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나 생명을 연장할 수 있게 한 의학의 진보는 고통 없는 죽음에 대한 일반적 통념을 뒤바꾸고 있다.
고통 앞에 무기력하기만 한 인간이 의술의 힘으로 '편안한 죽음'을 선택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고양이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끼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으로 숨는다고 한다. 하물며 사람인지라 남에게 추한 모습을 보이고 폐를 끼치고 싶을까.
'죽을 권리'와 '살릴 의무'의 끝없는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이것이 이른바 안락사의 논쟁이다. 안락사의 의미는 생존 가능성이 없는 병자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이다. 그래서 안락사는 예로부터 종교·도덕·법률 등의 관점에서 많은 논쟁이 되어왔으며 문학작품에도 자주 등장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루소(1712∼1778)는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육체적으로 빈사(瀕死) 상태에 처한 자는 윤리적으로 자살이 허용될 수 있다. 환자의 고통이 극복될 수 없고, 그 고통이 생의 의미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차라리 축복된 해결책이며 찬양할 가치마저 있는 결정이다"라고 안락사를 긍정적으로 보았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1788∼1860)도 생명에 대한 불가양적(不家樣的) 자결권(自決權)의 소리로 세계에 반향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불치의 질병에 시달리는 환자의 자기 결정권을 무조건 뭉갤 것이 아니라, 환자가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쪽으로 의견이 모이기 시작했다. 자살과 안락사의 논쟁은 이렇게 이미 오래전부터 찬반양론이 있었다.
소크라테스(BC469∼399)는 알 듯 모를 듯한 말로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유명한 메시지를 남겼다. 그것은 마치 "삶의 존엄이 먼저냐, 죽음의 위엄이 먼저냐?"라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많은 철학자는 생과 사에 대해 끝없이 질문하고 대답을 모색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존엄사법으로 불리는 연명의료결정법(2018)의 의미는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자기의 결정이나 가족의 동의로 연명치료를 받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법'으로, 정식 명칭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이 제정되었다.
회생 가능성이 없는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에게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등 네 가지 연명의료를 중단하여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토대로 하며, 말기 암 환자에게 한정되어 있던 특수임종병원 완화의료 대상자는 에이즈, 만성 폐쇄성 호흡기 질환, 만성 간경화 말기 환자까지 포함한다.
만약 조건을 충족하면 환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나 '연명의료계획서'를 통해 연명의료를 원치 않음을 명확히 밝혀두거나, 가족 2인 이상이 환자의 평소 뜻을 확인해 주면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게 된다. 환자의 뜻을 알 수 없을 때는 가족 전원이 합의해야 하며, 미성년 환자는 법정대리인(친권자)이 대신 결정할 수 있지만 악용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있다.
초고령 사회로 진입한 우리나라의 노인 자살률과 노인 빈곤율은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이다. 빈약한 노인복지 인프라 등이 국민 노년의 삶을 잘 보듬지 못하면서 노노(老老)케어(노인의 노인 돌봄)의 사례 가운데 홀로 남겨질 병든 배우자를 걱정한 '살인'이 벌어지기도 해 사회문제가 된 적도 있다.
문제는 빈곤한 노인들뿐만 아니라 말기 암 등으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노인들의 자살도 이어지고 있다는 데 있다. 이제 우리 사회도 '안락사'를 받아들여야 하는지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지에 대해 헌법적 차원을 논의해야 하는 시점이 도래했다.
안락사를 합법화한 스위스와 네덜란드는 '죽을 권리'를 인간의 존엄을 위한 권리로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안락사를 합법화했다. 자신이 어디서 어떻게 생을 마감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을 하나의 기본권으로 인정한 셈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종교계와 시민단체 등의 비판도 만만치 않다.
안락사를 합법으로 인정할 때 등장하는 또 하나의 문제는 바로 '조력자'에 대한 면책이다. 근대 형법은 대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에 대한 처벌을 정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자살자'가 목숨을 끊는 데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관여한 행위는 '불법'으로 인식해 자살 조력자는 처벌하도록 정하고 있다.
결국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말기 암 환자와 소생 불가능한 사람들에 대한 '안락사'를 법적으로 허용한다는 것은 자의적 생명 종결에 대한 직간접적 관여를 불법으로 처벌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인간의 죽음에 관여한 자에 대한 책임을 묻는 근대 형법의 체계가 뒤흔들리게 되는 셈이다.
사람들은 "100세까지 살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지만, 막상 100세가 되면 생각이 달라진다. 120세, 아니 150세까지 사는 인생을 말한다. AI의 발전에 따라 신약과 치료제 개발 속도는 비약적으로 빨라질 것이고, 40~50년 후 보편화될 반려 로봇이랑 함께라면 노인 혼자여도 안전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르코에 들어가려고 했던 늙고 병든 육신은 어느새 AI와 한 몸이 되어 생의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할까 자못 궁금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