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남계 조종국 예술혼(魂) 50년!

2024-10-24     박붕준

대전지역의 원로 서예가 '남계 조종국'은 문화의 불모지로 오명을 썼던 대전을,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헌신해 온 인물로 "문화예술은 우리가 사는 대전의 정신이고 품격이며 자존심"이라고 가슴에 품고 있다.

개인적으로 작품 몰두와 공익적으로는 예총과 의정활동 등을 통해 문화예술인 공간인 전시관이나 공연장을 갖추는데도 혼신의 노력을 다해, '예술의 불모지 대전'의 이미지를 변모시키는데 주춧돌을 놓았다.

대전문화예술 발전에 평생을 바친 대전.충청지역의 원로 예술인이자 서예가 <남계 조종국>선생을 만나본다. <편집자 주>

 1943년 1월 12일 출생했으니 만 나이로 정확하게 81세다.

용안이나 체격, 걸음걸이 말투에서도 도저히 8순의 노인(?)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젊은 비결이요? 그냥 편한 마음으로 욕심 안 부리고, 폐 끼치지 않고 배려하는 생활을 해서 그런가요?" 발음도 또박또박, 나이를 묻지 않았다면 60대 후반이나 70대 초반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젊다.

충남 옛 부여읍에서 4km 이상 떨어진 정동리 시골 마을에서 부친 조동교와 모친 이덕규 사이 7남매 중 누나(현재 85세) 아래 장남으로 태어난 남계 조종국은 중학교 2학년 시절, 부친이 40세도 되기전에 하늘의 별이 되어 충격에 빠진다.

6.25 때 인민군으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하고 논가에 버려져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그 후유증으로 영원히 이별을 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보통 사람들과 달리 나이에 맞는 적기에 학교생활을 하지 못해 학업 과정이 순탄치 않았지만 어릴 때부터 시골(?)에서 신동으로 불려 일찍 직업전선에 뛰어든 것도 한 요인이다.

부여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까지는 여느 학생들처럼 제 때 진학했지만 부여고등학교에 입학 후에는 홀어머니 조부모 밑에서 3학년 과정 중 중퇴, 당시 '수리조합'에 서기로 입사, 본의 아니게 생활전선에 뛰어들게 된다.

이후 방통고로 진학, 고교 졸업장을 취득하고 부여고에서는 중퇴생으로는 드물게 명예졸업장을 받게된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던 남계는, 1986년 부여 출신인 JP(김종필)의 추천으로 '엽연초생산조합'(전매청/ 한국담배인삼공사 전신)에 입사, 서기 업무를 보면서 '전국조합'을 결성하라는 JP의 명을 받아 이를 수행한다.

그러다가 JP가 공화당을 창당하면서 당무를 맡게되는 등 정당에서 총무직을 수행하지만 후일, 정치적인 핍박을 받은 JP가 외국으로 나가면서 청년, 조종국도 정당을 떠난다.

1970년 여름 기대하지 않았던 서울신문사 기자 입사시험에 덜컥 합격하지만 입사 1년만에 당시 박정희 정권의 독재정치에 맞서 정부에 반하는 기사를 작성하자, 사회불안을 조성했다는 이유로 7개월여 억울한 옥고를 치루다 형집행정지로 풀려나게 된다.

이 같이 유소년과 청년기 파란만장한 시절로 2006년 대전대학에 합격하고도 1년도 채 다니지 못했고, 동국대 교육대학원에서 교육학(한문교육)을 전공한 남계 조종국은 그래서 자신의 최종 학력 설명이 길어질 수 밖에 없다.

7살 때부터 한학자인 할아버지께 한자, 명심보감을 배우면서 지금의 대한민국 최고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지인이 충남 서산의 한 읍내 다방에서 서예전을 마련해 줘 35점의 작품이 모두 판매된 것을 계기로 자금을 모아 지금의 대전여중 부근에 화랑을 열어 대전의 전시장 역할을 맡았다.

대부분 공짜로 내 주다보니 거들(?)이 났고 사기까지 당했지만 서실을 운영해 당시 150여 명이 넘는 수강생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왕성한 활동을 해 그런지 나이 답지 않게 '젊은 형님'이라는 수식어가 따른다.

지금도 국보 제7호 홍경사를 비롯한 조선시대 학자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 선생 유허비, 대전시립미술관(농가월령가), 한성기 시비 등 지역의 기관, 단체 사무실을 방문하다 보면 남계의 작품을 쉽게 접할 수 있을 정도로 인기 작가이다.

그의 필체는 전서와 행서 위주의 한글 서체로, 우리 지역이 낳은 당대 최고의 서예가 중 한 명으로, 수필가이자 한 때는 정치인이기도 했지만, 뿌리부터 인정하는 공인 예술가다.

공직과 언론인 생활(서울신문 기자)도 잠시 했던 남계 선생은, 경험했던 모두가 뜻있고 보람있는 업(業)이었지만, 그래도 역시 자신의 업(業)은 서예가라는 것.

서예가이자 공인 예술가

대전시 오류동의 개인 연구실 벽에는 자신의 작품이 걸려있고 누가 보아도 서예 작업실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척박했던 이 고장 문화예술의 토양을 비옥하게 일궈낸 지역의 '문화예술 효시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원로 서예가 남계 선생!

지난 86년부터 '충남예총 회장'을 시작으로 '대전,충남예총회장', '한국예총 중앙부회장과 감사', '이사', '대전시카누협회장', '대전시야구협회장', '한화이글스후원회장', '제2~3대 대전시의원, 부의장, 의장'을 지내면서 문화 불모지로 오명을 썼던 우리 고장의 문화의 새 지평선을 얼었다는 평이다.

전국 지방 예총과 지방문화원의 정상적 운영 조직기반을 위해 지방 예총과 문화원을 정부와 지자체의 보조단체로 만들어 재정지원을 받을 수 있는 시금석을 놓았기 때문이다.

또, 각 시.군 예총 설립을 위해 회원단체를 조직, 아산예총을 비롯한, 보령, 서산, 논산예총, 부여예총과 공주, 조치원예총을 잇달아 태동시켰다.

대전.충청인의 문화적 긍지를 위해 열악한 환경에서도 국내 정상예술단 초청의 서막을 여는 등, 예총 활동으로 지역문화발전에 힘을 쏟았다.

'대통령상전국합창제' 신설과 '대전청소년교향악단'을 창단했고, 지방자치제 실시전인 1989년 '한국예술문화진흥회'를 설립, '전국 30대 서예가전', '충청미술 청년작가전'을 잇달아 개최하기도 했다.

특히, 작가와 후원자, 시민과의 네트워크를 형성시켜 청년작가들이 작품 제작에만 전념토록 지원, 당시 청년작가들은 현재 한국 화단의 중진작가로 성장하는 등 미술 발전에도 일익을 담당했다.

또, '충남개도 100주년기념 충청서예가전'과 지방문화예술지의 효시인 '충남예술' 발간, 한국예술문화진흥회에서 발간해 왔던 '대전예술'을 대전예총으로 이관시켰다.

이 밖에도 '충남의 풍속', '충남의 민요', '대전의 시, 대전의 노래' 발간과 사진예술 진흥을 위해 '백제사진대전람회'를 창설, 전국 공모전으로 발전시켰고, '충청남도산업미술대전'과 '대전시산업디자인전'을 신설하기도 했다.

1992년 한-중 국교정상화 이후, 한-중 문화교류회를 조직하고 남경시 서화원과 MOU를 체결, 제1차 한-중(대전-남경)서화교류전을 시작하면서 부족한 예산을 본인이 충당했다.

양국 문화교류 공로로 중국 남경시 정부로부터 '남경시 예술계연합회 명예고문'에 위촉되고, 중국 강소성 인민정부로부터 '강소성을 빛낸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수필가로의 서예가 남계

 

남계 선생은 언론사에 옥고(玉稿)를 기고하거나 마음을 담아 기고했던 글을 모아 발간한 것 칼럼집이 '계룡로의 아침'이다.

남계는 '내 마음의 꽃신' 작품을 통해, "빨간 꽃신을 신고 열정으로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고 하다보면, 세상에 나를 진심으로 이해해주고 아껴주는 친구가 과연 누구인가 회의가 생기고 서글퍼질 때도 있었다"고 회고하면서 글로 옮겼다고 한다.

남계 선생은, 첫 수필집으로 <별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 <남계 조종국 예술혼 50년>, 그리고 희수기념 수필집 <청산은 나를 보고> 등 5편의 수필집을 편찬하기도 했다.

이 수필집 중에는 겸허한 마음으로 우리 지역에 관한 애정과 충정을 담은 선생의 내면이 자연스런 필체로 담겨있다.

남계는 "문화예술은 지역발전에 큰 원동력으로 우리 대전이 어느 도시 못지않게 문화예술의 도시로 발전된 것이 자랑스럽다"면서 "문화예술은 우리가 사는 대전의 정신이요 품격이요 자존심"이라고 강조한다.

남계 선생이 기증한 지역 신문사 제호도 선생만의 혼이 담겨있고, 대전국악협회에는 10폭 크기의 한글 전서체 병풍을 기증하기도 했다.

원로 서예가의 회고

 

"한마디로 고행의 길, 청빈낙도(淸貧樂道)의 길을 걸어온 인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고연명(古硯銘)을 거울삼아 절차탁마(切磋琢磨)해 왔던 시간과 공간에서 내 자신의 개성과 철학을 드러내는 작업으로 스스로를 다스리게 한 서예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예가로서, 작게는 지역사회 나라에 작은 흔적이나마 남겨왔고, 앞으로 남은 여생도 같은 마음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남계 조종국 선생!

인생의 전성기인 40대, '예총회장', '예총중앙부회장', '대전시 의정활동' 등 경황이 없던 일상 속에서도 시간을 쪼개 지필묵과 함께해 온 세월이 흘러 이제 81살의 원로로 다가왔다.

"서예는 단순히 문자의 미적 재현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개성과 철학을 드러내는 작업이죠!

또, 명현들의 법첩을 스승 삼아 이를 바탕으로 내 자신만의 독창적인 서기(書氣)의 조화를 모색하는 예술로 자신의 삶을 겸허히 돌아보는데 큰 매력을 느끼고 있습니다"

당선! 낙선! 당선! 대전시의정회 회장

지역에서의 성공적인 예총회장직을 마치고 유력 정치인의 끈질긴 권유와 문화예술인들의 권리 앙양을 위해 전국동시지방선거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출마, 당선되고 4년 후 선거에서도 재선, 부의장에 이어 의장까지 역임하는 지도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2002년과 2006년 선거에서는 낙선해 정계를 떠났지만, 2,3대 대전시의원 7년간 경력과 의장, 부의장 경력으로 대전시의정회 회장으로 추대되면서 다양한 활동과 함께 분기별로 의정회보를 발간해 왔고, 10년만인 지난 한 달전 후배 의원에 물려 주었다.

88세 미수를 향한 젊은 형님

 

'야 야 야 내 나이가 어때서...', 2012년 7월 유행시킨 대중가요 '내 나이가 어때서' 가사처럼 남계 선생은 세월을 거꾸로 사는 열정적인 성격으로, 90세 졸수를 향해가는 망구의 나이지만 99세 백수 이후 까지도 젊은 형님 노릇을 할 태세이다.

지금도 사회 각계 각층의 사람들과 다양한 소통으로 분위기를 주도하는, 남계 선생은 앞으로도 서예가라는 직업 외에도 지역을 위한 일이라면 한 톨의 밀알 역할이 되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못 다한 이야기를 '남계 조종국 자서전'을 통해 지역사회 다양한 후배들에게 풀어내면 어떨까?

서예가로써 대전의 문화발전과 문예 진흥, 지역 예술인들의 권익 신장을 위한 기나긴 생을 살아온 남계 조종국!

"문화 불모지로 불려온 우리 지역의 문화적 성장을 위해 미력하나마 제가 보탬이 되었다면 평생 만족합니다"라고 자신을 한껏 낮추어 말한다.

9순을 향해가는 이 때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남계 선생은 이렇게 말을 맺는다.

"은퇴한 우리 지역 다양한 직업의 원로들이 모여 지역의 미래를 생각하고 화합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단체나 모임이 있었으면 합니다"

어언 50여 년간 예술 창작과 예술 행정, 풀뿌리 지역정치의 길을 섭렵하면서도 욕심을 갖지않아 그 흔한 훈장 하나도 없는 남계 조종국이 진정한 예술가요, 인간승리의 본보기가 되지 않을까?

<학력>

부여초/ 부여중 / 부여고 명예졸업/ 방통고 졸업/ 대전대 중퇴/ 동국대 교육대학원

<프로필>

대한민국미술대전(서예부문)초대작가. 심사위원. 운영위원

2011년 제30회 대한민국미술대전(서예부문)운영위원장

한국예총 부회장. 충남예총회장. 대전예총회장. 한국예총감사. 이사

대전광역시의회 의장&부의장(2.3대)

대전시야구협회장

한화이글스후원회장

대전시의정회 회장

- (사)한국예술문화진흥회 이사장

- 충청남도문화상(예술부문)

- 제6회 향토문화대상 현대문화부문 본상(서울신문사)

- 자랑스런부여인상(부여군)

- 대전시문화상(지역사회봉사부문)

- 부여100년을 빛낸 인물상(부여군)

- 한중문화교류회장

- 중국강소성을 빛낸 인물상(중국 강소성인민정부)

- 연락처 : 작업실 T.(042)531-9795 M. 010-4042-3261

 
 
박붕준 작가 캐리커처

작가 박붕준은 경희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강릉 MBC, 대전 MBC TV&라디오 뉴스 앵커, 보도국장 역임 후 정년퇴임 했습니다.

퇴임 후 대전과학기술대학교 광고홍보과, 교양교직과에서 11년간 석좌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다 2023년 2월말 퇴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