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한국의 폴 얀센'을 꿈꾸는 약학&과학자 김완주 박사

2024-11-01     충청헤럴드

과학입국을 표방하던 박정희 대통령 시대!

당시 대한민국의 부름을 받고 고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1세대 유치 과학자!

대한민국 신약개발 1호 과학자! 

대덕연구단지(현 대덕특구)에서 한국 신약개발을 위해 젊음을 바치고 연구소를 나와 58세의 뒤늦은 나이로  바이오벤처 <씨트리(현 HLB)>를 창업한 늦깍이 약학자이자 과학자, 경제인!

그 주인공은 김완주 박사로 지금으로부터 26년전(1998년) 신약개발을 꿈꾸며 연구소 동료 4명과 함께 창업, 성공한 CEO로도 각인되고 있다. 

올해 만 82세로 경영자로써 끈질긴 노력과 집념, 뚝심, 그리고 빠른 결정으로 약 20여년간 기업을 움직인 질서로 작동시켰다.  

고교 시절 문과에서 대학은 이과로, 과학자에서 교수로, 다시 기업인으로 변신했다가 지금도 '㈜바이온리퀴드(Bion Liqld)' 회장으로 8순이 넘은 현역인 영원한 '과학자'이자 '약학자!', '바이오벤처협회(현 바이오협회) 명예회장', 국내 정밀화학의 대부 역할을 추구한 김완주 박사를 만나본다.<편집자 주>

지난 2019년 말 연구소에서 나와 자신이 설립했던 'C-TRI /이하 씨트리' 보유 주식을 '메디포럼제약'에 넘기면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연구 의욕이 여전, 지난 1년전부터 다시 새로운 연구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김완주 박사는 일제 강점기 전남 구례에서 김성봉 씨와 박혜숙 씨 사이 3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난다. 초등학교 2학년 때 6.25 동란이 발발, 당시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청량리 산동네에서 가난을 안고 살았다.

그러나, 유달리 교육열이 높았던 부모는 아들을 도시학교로 보내기 위해 광주로 이사하고 이후 누나는 서울대에, 당시 6학년 이었던 김완주 초등생은 우등생만 들어갔다던 광주서중에 합격한다.
                                                

- 중학생 시절의 김완주 박사(앞줄 가운데) -

중학교 졸업 후 다시 명문 전주고를 거쳐 서울로 유학, 성균관대 약학과로 진학하게 되는데 약학과를 가기위해 문과에서 이과로 진로를 바꾸면서 이과생들이 공부했던 '수학2'가 부담되어 본고사에서 '수학2' 과목이 없었던 대학을 지원하게 된 것.

대학 졸업반 때 미국 유학시험에 합격했지만, 박봉이었던 아버지 봉급, 재봉틀 옷 수선으로 비싼 학비를 마련해야 하는 어머니 걱정으로 미국행을 포기하고 독일로 방향을 바꾼다.

독일은 생활비와 학비까지 대부분 정부가 지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대학시절 독일 유학은 생각지 않아 독일어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대학입시를 앞두고 약학 전공을 위해 갑자기 문과에서 이과로 바꿔 진학할 때와 흡사했다.

4년간 독일어를 배운 사람과 이제야 시작하는 자신과는 감히 비교가 되지 않는 언감생심(焉感生心)!

그러나 약학 전공을 위해 거의 매일 밤 뜬눈으로 달달(?) 외우면서 독일 유학시험 합격이라는 기적을 창출해 낸다.

대학을 졸업한 김완주는 부모님이 손에 쥐어 준, 고작 200달러를 들고 독일로 향발, 현지 마인츠대학과 함부르크대학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각각 취득한다.

 - 독일 체류 시절 연구실- 

독일 유학 중에 80여종의 신약을 개발, '약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폴 얀센 박사를 생면(?)하기 위해 무작정 벨기에로 가서 그 꿈을 이루었던 황홀했던 기억을 잊을수가 없다.

독일 대학원에서는 조교 생활로 생활비를 충당했고 졸업후에는 세계 굴지의 제약회사 '쉐링제약' 선임연구원을 거쳐 미국 신시내티대학에서 포스트닥 과정을 밟는 도중, 대한민국 정부의 부름을 받아 독일 유학을 떠난 지 7년 6개월만에 귀국하게 된다. 
                                   

박정희 정부의 '과학입국' 슬로건으로 정부의 세계 석학 과학자 유치 프로젝트가 가동되면서 1977년 귀국, 서울 홍릉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 몸을 담는다.

- 정부 유치 재독한인 과학자들 - 

박 대통령 시해(1980. 12.12)사건 발발 후에는 성균관대 약학과 교수로 잠시(3년) 옮겼다가 1986년 개원한 한국화학연구소로 스카웃되면서 의학연구부장, 신물질창출 국책연구사업단장 등 주요 보직을 맡아 연구 개발에 매진한다

정부출연연구소라는 틀에서 여러 가지 제한적인 연구 분위기가 마땅치 않은데다, 국내 제약기업이 제네릭(특허가 만료된 오리지널 의약품의 모조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아쉬움을 느껴왔던 김 박사는 창업을 생각하다 실행에 옮긴다. 

1998년 4월 설립된 바이오 벤처기업 '씨트리', 이 때 나이 58세로 정년 후 편안하게 연금받아 살면 편하지만 독자적 연구 분위기속에서 신약과 신물질 개발을 위한 집념이 창업의 꿈을 막을 수 없었다.

김 박사는 "지금은 60대도 당당히 청년이라 부르지만, 25년 전에는 주위에서 다 말렸죠! 사실 당시 연구 실험만 했었지 창업에 대한 불안감도 있었고요! 그렇지만 연구 개발하고 싶은 아이템이 눈에 보이는데 어떻게 정년퇴임만 기다리나요!"라고 회고한다.                   

김 박사 언급대로 창업했던 당시에는 지금은 거의 사라진 '환갑잔치'를 하던 시절이었으니 당시, '6순 잔치'를 앞둔 노인 후보(?) 창업을 극구 말릴 수 밖에...

김 박사의 창업 의지는 지금 객관적으로 봐도 당연했다는 평가다.

대덕연구단지 재직 중 국내 라이센싱(신약개발 후보물질 기술 수출) 1호인 김 박사는 "당시는 대단한 연구 업적이었지만, 이제는 '신약의 상품화'까지 달성하는 목표의 상향 조정과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글로벌 제약기업으로 도약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1980년대 완제의약품 수입 자유화와 1987년 물질특허제도 도입으로 국내 제약업계가 위기를 맞았을 때 정부 차원의 신약개발 지원에 관한 로드맵을 제시한 것도 김 박사였다.

1987년 에이즈치료제 개발, 1989년 대한민국 최초의 신약인 제3세대 퀴놀론제 항생제를 개발, 한미약품에 기술이전하고 스위스 로슈 제약회사에 600만 달러에 수출하는 쾌거의 역사를 쓴다.

그 이전에도 세파계 항생제를 개발, 국내 과학계의 센세이션을 일으켜 과학뉴스가 지상파 텔레비전 메인뉴스 톱으로 장식되기도 했다.

김완주(한국화학연구소 박사) 인터뷰

▶김완주(한국화학연구소 박사) 인터뷰 (바로보기)

이 와중에 대학교재 '스테로이드 화학(공저)'을 출간, 자연계열 베스트셀러로 등극한다.

1993년에는 스위스 클라인비참에 2100만 달러(현재 기준 280억원)에 국내 신약 1호기술(2세대 퀴놀론계 항생제)을 수출한다.

 - 한국 최초의 항생제 특허실시권 계약 -  

KIST 재직 시 '국민훈장목련장' 수상을 비롯, 국내 신약.과학계 발전에 헌신한 공로로 '석탑산업훈장', '대통령표창', '대한민국기술대상', '과학기술부장관상', '이 달의 과학자상' 등을 잇달아 수상한다.
   

1998년 회사(씨트리)를 설립하는데 당시엔 생소했던 펩타이드(단백질 조각)의약품 개발에 중점을 두었다.

펩타이드는 생체 친화적 특성이 높아 환자들의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높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김 박사는 벤처 씨트리 설립 2년 후인 2000년 3월 항진균제인 터비나핀의 제조 및 생산공정을 개발했고 8월부터는 위염과 십이지장염 항체를 함유한 계란을 개발했다.

또, 그 해, 의약분업시대 약국들이 처방이 없어도 생존할 수있도록 천연물제품 공급과 경영기법을 제시할 수 있는 '약국 프렌차이즈사업'에 진출하기도 했다. 

그 해 12월에는 세계 2번째로 클라리스로마이신의 신합성법을 개발, 세계 45개국에 특허출원하는 등 바쁜 가운데에서도 2001년 벤처 제약기업가의 이야기를 담은 '생명과학과 벤처비즈니스'를 출간, 수필가로서의 재능도 보여준다.

2002년 대한민국이 월드컵 열기로 뜨거웠던 7월 12일 한국바이오벤처협회(현 한국바이어협회) 제3대 회장으로 취임하는데 당시 나이 60세로 환갑 때였다.   
                       

2004년에는 당뇨 치료제인 보글리보스를 만드는 핵심중간체인 발리엔아민을 개발하고 2013년에는 비천연 아미노산 대량 생산 기술개발에 성공한다.

2014년에는 에틸아민의 치매치료제, 펩타이드 의약품인 데스모프레신(야뇨증치료제) 원료 의약품을 각각 개발하고 그 해 연말에는 주식을 코스닥에 상장하는 기염을 토한다.

2015년에는 펩타이드 의약품인 탈리렐린(척수소뇌변성증 치료제) 개발을, 2016년에는 저용량&고용량 치매치료제(리바스티그민타르타르산염 주성분)를 개발하는 쾌거를 이루어 낸다. 

또, 2017년에도 치매치료제 주성분 리바스티그만의 핵신 중간체 제조법 특허도 받는 등 주요 제품으로는 전문의약품 위궤양치료제인 '시메티딘정' 고혈압치료제인 '로자틴정'이 있다.

실험실밖에 몰랐던 김 박사에게 기업 운영의 노하우를 전수해 준 곳이 한미약품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미약품은 국내 제약사 최초로 다국적 제약사 로슈에 항생제 '세프트리악손'의 개량제법을 수출했는데 당시 KIST에서 있었던 개발 주역이 김 박사로, 그 때 첫 인연을 맺어 1995년부터 3년간 한미약품 부사장 겸 한미정밀화학 대표로 영입된다.

이곳에 바이오연구실을 처음으로 만들면서 R&D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경영에 필요한 것들을 배우기 시작한 김 박사는, 제약회사를 나와 화학연구소에서 함께 일했던 연구원 4명과 함께 용인의 한 대학 실험실을 빌려 연구를 시작했다.

신약개발을 위해 연구에 몰두했지만 들어오는 돈이 없어 운영 자금이 부족했고, IMF 사태까지 겹치면서 어려운 순간이었지만 김 박사는 오히려 이를 기회로 삼았다. 

독일의 제약회사 바이엘이 한국에 설립했던 공장을 팔고 생산을 접겠다는 정보를 접하고 바이엘 한국지사장과 만나 설득 끝에 공장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하게 된다.

따라서 바이엘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폐업 없이 생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고, 김 박사도 학교 연구실 신세를 면하면서, 당시 마침 김대중 정부가 IMF 극복을 위해 벤처를 키워드로 다양한 육성정책을 쏟아내 운이 좋게 투자를 받았던 것. 
                              

생산 설비까지 확보한 김 박사는 R&D를 통해 치매와 파킨슨병 등 퇴행성 노인질환 치료제와 척수소뇌변성증 관련 신약을 개발하는 등 펩타이드 전문 바이오 제약기업으로 성장시키게 된다.

"신약의 상품화를 위헤서는 자본 투자와 글로벌 영업력이 수반되야 한다"는 김 박사는 "일본의 '다케다', '아스텔라스'처럼 이들 제약사들도 글로벌 시장을 겨냥해 신약의 상품화를 목표로 도전해 성장헸다"고 회고한다.
                                     

회사 경영과 R&D에 집중하면서도 그는 여러 바이오인들과 바이오벤처협회를 만들어 후배들의 창업을 독려했고 국내 제약산업의 세계화를 위한 컨설팅과 연구만 하던 곳들이 어떻게 제품을 생산하고 이익을 낼 수 있는지 자문하는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20여 년을 출연연에서, 또 20여 년을 경영인으로 살아온 그는 2019년 '씨트리'를 치매치료제 천연물 신약을 개발하는 '메디포럼제약'에 약 206억에 인계했다.

약학자에서 기업까지 성공시키며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김 박사는 이미 경영능력까지도 공인받아 세종대에서 명예경영학 박사학위까지 받았다.(2001.2)  

자신이 세웠던 '시트리' 대표 재직 당시에는 정열을 불태웠던 한국화학연구소(원) 5대 동문회장으로도 활동하기도 했다.

대전을 자주 오간다는 그는 "기회가 좋은 만큼 안정된 직장에 안주하지 말고 창업에 도전해 보길 바란다"고 제안했는데, 그 이유는 연구자 창업을 장려하는 프로그램이 많다는 것. 

김 박사는 "지원은 충분하니 이제는 연구자들이 나설 때"라며 "연구소에 있으면서 자신만의 아이템을 꼭 가져야 한다"면서, "과거엔 전쟁에서 사람을 많이 죽인 사람이 영웅이 됐지만. 이제는 사람을 많이 살리는 사람이 영웅이 된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김 박사는 최근 'One Pill, One Dream'<어느 약학자의 60년 신약개발>(부제) 자전적 스토리를 에세이처럼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출간했다.

이 자서전을 통해 김 박사는 "이 이야기는 내 삶의 궤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정밀화학과 신약, 바이어벤처 개화에 관한 대서사시와 다르지 않다. 나는 그 서막에 줄곧 서 있었다"고 회고한다.      

특히, 신약개발 뒷 이야기로 채영복 전, 과기부장관과 물질특허, 한미약품 창업자와의 인연, 21년간 경영한 '씨트리'에 관한 진한 추억을 담고 있다.  
   

"신약 개발은 세계 시장이 주무대가 됐지요! 축적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흐름에 맞게 신속한 의사결정을 하고 기민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신약이나 바이오의약품 모두 항체와 백신 개발이 우선되야 합니다"라고 강조한다.  

이런 의미에서 HLB제약(김완주 박사 설립 씨트리 전신)의 '장기지속형 주사제'(SMEB) 개발을 위한 세계 최초의 임상 진입을 주시하고 있다.

- 한국화학연구소 시절, 노벨상수상자 히칭스 부부 -

2020년부터 잠시 야인(?)으로 돌아갔지만 지난 1년전부터 다시 현재의 '㈜바이온리퀴드'를 세워 석사급 연구원들과 함께 새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와 함께, 자신이 창업한 기업에서 자신이 연구했던 프로젝트 결실 독려를 위해 제약회사의 동탄연구소 오픈식까지 참석, 지속형 주사제 개발에 대한 의지를 심어줄 정도로 신약 개발에 대한 의지가 강하다.     

제약회사 임상은 다국적제약사 BMS의 세계적인 먹는 혈전증치료제인 '엘리퀴스'를 장기지속형 주사제로 개발하기 위한 연구로, 성공하면 글로벌제약사로 웅비할 수 있다는 것.  
                                 

- 독일 레겐스부르크 시장 예방 -

김완주 박사는 향후에도, 자신이 구축한 연구생태계와 기업 인프라를 후배들이 반석위에 더 높게 쌓는 '성공 방정식'을 만들어 대한민국 'K-신약' 산실의 주춧돌이 되어 주기를 소망하고 있다.
                           

신약 개발을 목표로 평생을 살아온 원로 약학자이자 과학자인 김완주 박사는 지금도 '한국의 폴 얀센' 꿈을 꾸는 진행형으로 힘찬 날갯짓을 펴고 있다.    

*과학자 김완주는

▲ 1942년 4월17일 전남 구례
▲ 광주서중/ 전주고/ 성균관대/ 독일 마인츠대 석사/ 독일 함부르크대 약학박사    
▲ 세종대 명예 경영학박사

 

-경력 -

▲ 독일 쉐링제약 선임연구원 ▲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유기화학연구실장
▲ 카이스트 겸임교수/ 수원대 석좌교수/ 충남대. 서울여대 겸임교수/ 전북대 초빙교수     
▲ 성균관대 약학과 부교수 / 한국화학연구소 신물질창출 국책연구사업단장. 의약연구부장 
▲ 한미약품 부사장 겸 한미정밀화학 대표
▲ ㈜씨트리 대표 
▲ 한국바이오벤처협회 3대 회장
▲ 경기바이오센터 이사
▲ 춘천바이오산업진흥원 이사 
▲ 디엑스 엔 브이엑스 고문    
▲ 현, ㈜바이온리퀴드 회장
   
-상훈-

▲ 국민훈장목련장 / 석탑산업훈장/ 대통령표창/ 과학기술부장관 표창/ 정진기 언론문화상 
한국화학연구소 연구대상 등 다수   

- 저서 - 
▲ 생명과학과 벤처 비즈니스(2001 미래M&B)     
▲ 스테로이드 화학(공저/ 2001 민음사)  

박붕준 작가 캐리커처

작가 박붕준은 경희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강릉 MBC, 대전 MBC TV&라디오 뉴스 앵커, 보도국장 역임 후 정년퇴임 했습니다.

퇴임 후 대전과학기술대학교 광고홍보과, 교양교직과에서 11년간 석좌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다 2023년 2월말 퇴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