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萬年 엔지니어! 대전시바둑협회' 최재만 회장

2025-07-11     박붕준

지난 4월 23일, '제3대 대전광역시바둑협회' 신임 회장으로 취임한 최재만 회장의 대전시 서구 정림동 사무실에 들어서니, 당초 상상했던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다.

'바둑협회장'에 취임했다면, 지난 2016년 인공지능 알파고와 대결을 벌였던 이세돌 9단이나 세계 최강인 신진서 9단, 박정환 9단 정도는 아니더라도 바둑 실력은 도사(?)급일 것이라는 예상이었기 때문이다. (도사급 실력 여부 확인은 후반부 끝에 정답)

또, 사무실에 들어서면 기원(棋院) 크기의 구석 공간 정도에 바둑판이 놓여 있을 것이라고 예견했지만,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사무실 구조는 보통 일반 회사 사무실 분위기와 비슷했지만, 특이한 점은 텔레비전이 가득(?) 넘쳐 한눈에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사무실 한쪽 벽은 네 대의 대형 텔레비전이 완전히 벽을 가릴 정도로 설치돼, 텔레비전 수상기가 없는 일반 회사와는 다른 정서가 느껴졌다.

더구나 송출되고 있는 방송은 지상파나 뉴스 전문 채널이 아닌, 'SmileTV Plus', 'TVasia Plus', 'WeeTV' 등이었다.

그 이유는 '대전시바둑협회장'이라는 직함이 대전 바둑인의 저변 확대와 대전 바둑 발전을 염원하는 최 회장의 서번트 리더십에 기반한 봉사직일 뿐, 실제 직업은 해당 방송들을 운영하는 TRA Media의 CEO이자 진중IT의 대표이사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업체를 운영하면서 바둑협회장까지, 세 가지 역할을 순조롭게 수행하고 있는 최재만 회장은 나이 7순 중반에 접어들었지만, 밝은 성격 덕분에 10년 이상은 젊어 보인다.

충남 보령군(현 보령시) 오천면 갈현리에서 부친 최성희 씨와 모친 이상열 씨 사이에서 6남매(5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최 회장은, 주민등록상 1951년생으로 만 나이 74세다.

그러나 옛날 농촌에서 농사일로 바빠 출생신고가 늦었던 것처럼, 실제 출생은 한 해 빠르다고 한다.

보령중학교 시절

보령 주포국민학교(현 주포초등학교)를 거쳐 보령중학교에 진학한 최 회장은, 1967년 시골 마을 촌뜨기(?)의 학창 시절을 뒤로하고 대전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1960년대 대한민국은 식량이 부족해, 등교하면 친구에게 "아침밥 먹고 왔다!"는 말이 자랑스러울 정도로 지독한 보릿고개 시절이었다.

대전 중도공고 시절

이 시기는 박정희 대통령이 '식량 증산'과 '과학입국'을 부르짖던 시기로, 기술계 고등학교나 대학을 졸업해 취직해 돈을 벌면 '최고로 성공한 사람'으로 추켜세워지던 때였다.

중학교를 마친 어린 소년 최재만은 학문적 연구보다는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미래 로드맵을 '기술자, 엔지니어'로 정하고 대전의 기술계 고등학교로 유학을 결심한 것이다.

대전 중도공고 시절

대전 중도공고(현 계룡디지텍고, 구 계룡공고로 교명 변경)에 합격해 전자 전공 기술을 익힌 후, 고도의 기술 지식을 쌓기 위해 대전공업대학교(현 대전한밭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진학하며 제도권 엔지니어가 되기 위한 긴 여정을 시작했다.

1960년대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출산율이 최고조에 달해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국가 캠페인이 전개될 정도였다.

고교 시절 고향 방문

초·중학교는 2~3부제 수업이 기본이었고, 고등학교는 한 반에 80명 가까운 콩나물교실이었다.

군 입대 자원이 넘쳐나던 시절, 정부는 장남은 부모를 봉양하라고 군 복무에서 제외시키는 여유(?)까지 있었으니, 저출산 시대인 요즘과는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6남매 중 장남이었던 최 회장은 결국 군대 구경조차 할 수 없었고, 재학 중 '국가공인 무선설비기사 자격증'을 취득한 그는 졸업과 함께, 시골 중학생 시절 그리던 직장인의 꿈을 이루게 된다.

최재만 엔지니어(좌측 두 번째)

1971년 2월, 대학 졸업과 함께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KBS 식장산중계소'에서 방송 송출을 담당하며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1년 후 충남도청 무선통신망 시설에 참여하는 엔지니어로 이직했다.

예나 지금이나 혼자 생활하면 씀씀이가 많기 마련이라, 당시 1만 3천 원 정도의 박봉으로는 저축할 여유가 없었다.

20대 초반의 열혈 청년 최재만은 결국 1년 반의 공무원 생활을 접고 충청북도 청주로 눈을 돌린다.

청주문화방송(현 MBC충북) 기술직 사원 채용시험에 응시한 청년 최재만은, 공무원 시절보다 세 배 많은 급여와 총각 신세를 청산하겠다는 두 가지 야무진(?) 목표를 세우고 이직했다고 파안대소(破顔大笑)하며 회상한다.

유망한 엔지니어 청년 최재만은 이 두 가지 목표를 모두 달성했다.

청주 MBC에서 근무한 지 3년째 되던 1974년, 지인의 소개로 한 살 아래인 당시 25세였던 김연옥 여사에게 프러포즈해 '결재(?)'를 받아 결혼했고, 다음 해에는 첫 딸까지 '횡재(?)'하는 복을 받는다.

봉급도 많고, 총각 딱지도 떼고, 예쁜 딸까지 얻으니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던 '딸바보 사랑맨' 최재만 엔지니어는 5년간의 청주 생활을 마무리하고 대전으로 이전하며 또 다른 목표를 세운다.

이번에는 대전 MBC 공채에 도전해 대전 입성에 성공하고, 1년 후인 1978년 둘째 공주를 품에 안으며, 아들만 두고 있는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소위 '딸딸이 아빠' 대열에 합류한다.

두 명의 손자와 손녀까지 얻은 최 회장은, 지금도 두 자녀가 현직에 재직 중(TRA미디어 총괄 & 구찌코리아 이사)이며, 아빠의 열혈 '일 중독' 기질을 닮아 동분서주하고 있다고 귀띔한다.

안락한 가정 속에서 대전 MBC 기술직 엔지니어로 17년간 근무하던 '딸딸이 아빠'에게 새로운 유혹이 찾아온 것은 1994년, 바로 대사건(?)이었다.

대전 지역 첫 민영방송인 대전방송(TJB) 개국 준비가 시작되면서, 대전시 효동(옛 우성사료 사옥)에서의 첫 전파 발사 준비 책임자로 지목된 '첫 스카우트 타깃'이 바로 최재만 엔지니어였다.

스카우트를 당하려면(?) 당연히 이직 전 대전 MBC보다 더 나은 조건이 제시되어야 하는 법.

"당시 스카우트 조건이 어땠느냐?"는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다) "봉급은 거의 두 배, 보너스는 1,000%"라고 귓속말로 전해준다.

여기에 더해, 이직 전 차장 직급에서 대우(직급)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부장으로 승진한 그는, 이후 'TJB 대전방송'이 현재 유성구 도룡동에 신사옥을 건설하고 방송 송출까지 책임지는 모든 과정에서 대역사를 주도했다.

TJB대전방송 이전식장 앞 최재만 회장 (좌측 첫째)

최재만 회장은 재직 기간 동안 기술국장, 경영국장, 신사옥건설본부장(이사 대우)을 역임하고, 58세에 정년 퇴직한 이후에도 다시 부름을 받아 2012년까지 약 5년간 엔지니어 장인으로서 방송 기술 노하우를 전수하며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특히 이 기간 동안, 은행동 으능정이거리 스카이로드 영상 송출을 위한 기술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지금도 이곳을 걷다 보면 "맨땅에 헤딩한다"는 신념으로 기술 시스템 작업에 혼신을 쏟았다고 회고한다.

최 회장은 이후 잠시 휴식기를 가진 뒤, 2015년부터 현재의 'TRA미디어' CEO로 재직하며 'SmileTV Plus', 'TVasia Plus', 'WeeTV' 등 3개 텔레비전 방송을 운영하고 있고, 2017년에는 정보통신업종인 '진중IT' 기업도 신설해 함께 운영 중이다.

현재 최 회장의 사업을 돕고 있는 파트너는 대전 MBC 재직 시절과 TJB 대전방송 이직 당시 함께한 후배 엔지니어 강기수 이사, 그리고 이상권 본부장으로, 두 사람 모두 가까이에서 보좌하고 있다.

강기수 현 이사, 최재만 회장(좌로부터)

"대전 MBC 재직 때였는데요! 컬러 TV 시대로 접어들며 컬러 방송을 해야 했지만, 당시 2억 원(지금으로 치면 약 10억 원)에 달하는 컬러 송신기 구입 예산이 없어, 흑백 송신기를 컬러로 개조하는 작업을 선배 김현수 국장님(당시 부장)과 함께 해결했던 일이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지그시 눈을 감고 추억에 잠긴다.

문화공보부, 도청 공무원, 청주 MBC, 대전 MBC를 거쳐 TJB 대전방송에 이르기까지, 최 회장의 재직 기간 동안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사회 초년생 시절, 유선 전화만 있던 당시 충남도청 각 시·군의 무선통신망을 연결해, 무전기로 충남지사(당시 민유동 지사)가 도내 시장·군수들과 동시에 통화하며 공무를 논의할 수 있도록 했던 일도 기억에 남는다. 충남지사가 매우 흡족해하던 모습을 그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TJB 대전방송 개국 송출을 위한 기술 산파 역할,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방식으로의 방송 전환, 그리고 국내 방송 사상 최초로 식장산 송신소의 무인화를 실현하며, 전국 송신소 무인화의 기틀을 마련한 선구자이기도 하다.

아마추어무선사(Ham) 자격증을 따 '93년 대전엑스포' 기간 동안 국내는 물론 전 세계로 홍보했던 보람은 지금도 생생하다고 한다.

또한, 송신소 무인화를 주도해 인건비 절감 성과로 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했지만, 한편에서는 "최재만 엔지니어 때문에 일자리를 빼앗겼다"는 뒷이야기를 듣기도 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리고 엔지니어로서 기술 연구 등 일에만 몰두한 나머지, 자녀에게 다정한 A학점 아빠, 좋은 남편이 되지 못한 것이 미안하고, 일에 쫓겨 대인관계에도 충실하지 못했으며, 후배와 동료들에게도 충분한 애정을 주지 못한 점이 아쉽다고 회고한다.

이상권 본부장-최재만 회장-김연옥 대표-강기수 이사(왼쪽부터)

따라서 최재만 회장은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지금처럼 건강을 유지하고, 회사가 더 성장한다면 후배나 동료 등에게 일자리를 창출하고 싶다는 바람을 갖고 있다.

또한, "어깨에 지고는 못 가고, 먹고는 간다"고 할 정도로 지금도 한두 병의 약주(?)를 즐기며 여생을 건강하게 보내고 싶다는 소망도 품고 있다.

대전 중구 산성동(한밭가든아파트) 한곳에서 네 가족이 함께 살다가, 지금은 두 딸과 손주들이 서울에 거주해, 현재는 부인과 단둘이 35년 가까이 함께 살고 있다.

50여 년간 방송통신 분야의 만능 엔지니어 장인으로 활동해 온 최재만 대전광역시바둑협회장은, 지금도 현역으로 자신의 두 곳의 회사와 협회 등 '세 마리 토끼'에 싱싱한 풀의 샘을 공급하고 있다.

바둑 실력은 6~7급 정도이지만, 협회 회원들의 화합을 주도하는 데 주저하지 않겠다는 최재만 회장은, 엔지니어 장인으로서 '더 멀리, 더 높이' 비상하기 위해 힘차게 날갯짓하며 웅비하고 있다.

<수상>

'정보통신부 장관상', '한국방송대상 기술상',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상', 각종 표창 및 감사장 등 다수

 

박붕준 작가 캐리커처

작가 박붕준은 경희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강릉 MBC, 대전 MBC TV&라디오 뉴스 앵커, 보도국장 역임 후 정년퇴임 했습니다.

퇴임 후 대전과학기술대학교 광고홍보과, 교양교직과에서 11년간 석좌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다 2023년 2월말 퇴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