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특구전경
대덕특구 전경 [사진=충청헤럴드DB] 

대한민국의 역사는 새마을운동의 정신적, 경제적 기반으로 고속 질주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덕의 과학'이라는 에너지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과학 강국> 대한민국으로 웅비할 수 있었을까?

때마침 올해는 대덕특구(옛 대덕연구단지) 조성, 50년을 맞는 뜻깊은 해로, 옛 보릿고개 시절에서 제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며 선진 과학으로 이끈 대한민국 모든 과학자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면서 제4대 과학기술부 장관을 역임한 채영복 박사(한국화학연구소(원) 3, 4, 5, 6대 소장)를 만났다. <편집자 주>

1차 산업을 주요 생업으로 하던 시대, 대한민국 1세대 과학자이자 화학자인 채영복 박사!

강원도 두메산골 철원군 금화리에서 평강 채 씨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채 박사는 지난 2014년 5월 경기과학기술진흥원장과 상지학원 이사장을 끝으로 공직자를 떠난 지 9년!

87세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체적으로, 특히 5-60년 전 기억력은 AI를 능가할 정도로 지난 연대까지 또박또박 설명한다.

그러니 지금도 대한민국 원로 과학자들의 모임인 사단법인 <원정연구원> 이사장직을 맡아 한국 과학발전을 위한 지원 활동을 펼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월이 흐르며 골프 구력은 보기 플레이 정도이지만 몸에 무리하지 않도록 유화 스케치로 취미생활을 한 덕분에 최근 펴낸 서적의 표지도 자신의 작품으로 했다.

                                                   채영복&대한민국 정밀화학 개척자들 책자 표지
                                                   채영복&대한민국 정밀화학 개척자들 책자 표지

6.25 전쟁 이후 60년 대 1차 산업 농경 단계에서 벗어나 연구개발과, 2, 3차 산업을 국가 성장 동력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은, 우리 과학자들이 선진국의 과학기술을 따라잡기 위해 굵은 땀방울을 흘렸기에 가능했다.

'과학입국'을 표방했던 척박했던 60년대 초, 대한민국 1세대 청년 과학자 채영복은, 이 땅에 유기화학 분야를 개척하면서, 이제 87세의 老과학자로 세월의 흐름과 함께하고 있다. 

서울대 문리대 화학과를 졸업했던 1959년 당시는 정치권의 혼란과 정국 불안이 심각할 무렵으로 채 박사는 낯선 이국 땅 독일로 향발, 뮌헨대 대학원에서 과학자의 원대한 꿈을 잉태하기 위한 드라이브를 걸기 시작한다.

독일로 간 계기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의 두뇌들이 선진국에서 배우도록 정부의 국비장학생(원자력연구소) 제도를 첫 도입, 선발시험에서 18 대 1의 경쟁을 뚫고 합격했기 때문. (월 250달러 장학금 지급 / 당시 1인당 GDP 80불)   

독일에 첫 발을 디딘 지 6년 만인 1965년 유기화학 박사학위를 받고, 현지 '막스플랑크 세포화학연구소' 연구원으로 발탁, 노벨상 수상자 리넨(F.Lynen) 교수와 '복합효소에 관한 생화학' 공동연구를 시작, 본격적인 과학자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러다가 9년간의 독일 생활을 청산하고 미국 '뉴욕대 의과대 생화학과' 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는데 역시 노벨상 수상자인 오초아(S.Ochoa) 교수의 분자생물학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  

노벨상 수상자와 '단백질 생합성 메커니즘' 공동연구를 하면서 서서히 경지에 올라, 채 박사는 미국에서 연봉으로 수만 달러를 받을 수 있었지만, 조국의 부름을 받아 미국 연구원 생활 3년을 뒤로하고 고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귀국하던 해! 미국은, 존슨 대통령이 이민을 차별 없이 받는 이민법을 공포하면서 당시 보릿고개였던 대한민국에서는 미국 이민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또, 베트남전에 따른 국군 파병,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등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도 한국은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지만, 채 박사는 꽃길을 두고 오히려 10여 년 만에 모국 땅을 밟은 것이다.

귀국과 함께, 채 박사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 몸담아 유기합성연구실장, 응용화학연구부장 등 연구책임자로 거의 13년 가까이 주야를 가리지 않고 실험실에서 땀방울을 흘렸다.

그러던 중, 1982년 1월, 정부로부터 한국화학연구소(원)를 맡아달라는 특명을 받는다.

국가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화학 원천기술의 개발 및 기술이전을 통해 화학산업의 선진화 임무를 수행하라는 것!

한국화학연구소 3대 소장에 취임한 채 박사는 1993년까지 3, 4. 5, 6대 화학 사령탑으로 11년간 이어진 대덕연구단지(특구) 최다 연임 기관장 기록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채 박사는 한국화학연구소 재직 때 대덕연구단지 기관장 협의회장을 맡으면서, 해외유치 과학자들의 거주 편의를 위해 연구단지 내 개인주택 부지 구입과 건축비를 저리로 대출, 과학자들의 경제적 걱정을 덜어주는데 큰 일조를 했다. 

연구원들의 노후를 위해 정부에 건의, 연금에 준하는 '과학기술공제회'를 만들어, 퇴직 후에도 현재의 과학연금을 받도록 한 것도 20년 전 당시 채 박사 업적 중의 하나다.  

또, 대덕초.중학교 개교에 앞서, 최고의 능력을 겸비한 교장과 교원 유치를 위해 교육당국에 '교원 평가 가점' 조항을 신설토록 해 배치함으로써 지금의 명문 학군으로 만들었다.

지금은 흔하지만 당시, 봉고버스를 임대해 대전 시내에서 변두리였던 연구단지 학교까지 무료 운행토록 해 등교 편의를 제공하고, 당시 귀했던 PC 컴퓨터를 연구소들의 협조를 받아 대전에서는 처음으로 대덕초.중.고에 전달, 대전 도심 학교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다.

채 박사는 지금은 폐관된, 당시 대덕문화센터에서 연구원 가족들을 위한 예술행사도 마련, 해외유치 과학자와 가족들의 문화 갈증을 풀어주고, 연구단지 수영장과 골프장도 건설, 연구단지 과학자들의 복지에 힘을 쏟았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초대 원장을 지낸 복성해 박사는 "미국에서 연구할 때 채 박사께서 대한민국 생명공학의 교두보를 위해 수차례 미국으로 찾아와 귀국을 종용한 애국 과학자였다"면서 "미국에서의 최고 조건을 포기하고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는 에피소드를 전한다.

그만큼 고국을 사랑하는 채영복 박사에게 매년 3월 24일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날! 

바로 <세계 결핵의 날>이다. 

'후진국 병'이라고 불리는 결핵은 거의 퇴치됐다고 하지만, 아직도 세계적으로 매년 약 1000만 명이 새로 감염되고, 우리나라에서도 10만 명당 49.4명의 결핵환자가 발생,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 사망률은 세계 3위의 불명예를 안고 있다.(WHO 2020)

50년 전만 해도 외국에서 고가로 수입했던 결핵약을 대한민국의 한 과학자가 개발하지 못했다면 비싼 값을 주고 치료제를 복용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한국은 치료제 '에탐부톨(ethambutol)'의 연간 수입이 120만 달러 규모로, 원가는 kg당 20달러에 그쳤지만 수입가는 무려 10배인 200달러에 달했던 것.     

바로, 이 치료제를 개발한 과학자가 당시 33살의 약관, <과학자 채영복>이었다.

미국과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 개발로, 당시 콧대가 높았던 일본 화학계도 개발하지 못했던 결핵치료제를, KIST에서 결핵치료제 개발을 시작, '에탐부톨'을 최초로 국산화했다.

그러나 개발 과정에서 '에탐부톨' 제조사(아메리칸 시안아미드)가 중간 원료인 '니트로프로판(nitropropane)'을 전 세계적으로 독점하면서 개발이 쉽지 않아, 결국 '니트로프로판'을 쓰지 않고 자신이 '독자적 합성법'을 개발, 이를 통해 '에탐부톨' 개발에 성공한 것.

향후 결핵치료제 실제 세계시장 규모는 2020년 5100만 달러에서 2028년 6900만 달러로 증가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1994년 대한화학회 회장으로 부임하던 해, 우리나라 과학기술 석학으로 구성된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 발족되면서 첫 사무총장으로 추대되는 채 박사는, 당시 초대 회장이었던 조완규 전 서울대 총장은 "채 박사는 대한민국 최고의 화학자이자 탁월한 행정가"라고 회고하고 있다.

내년 개원 30주년을 맞아 1천여 명의 회원으로 성장한 한림원에 대해 채 박사는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역량을 높였고, 정부가 올바른 과학기술정책을 세워 나가도록 역할을 수행하고 우리나라 과학의 세계화에 기여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부회장과 '기초기술연구회' 이사장 등 대한민국 과학계 각종 단체를 주도했던 채영복 박사!

                                                                      오른쪽에서 여섯 번째 채영복 박사
                                                                      오른쪽에서 여섯 번째 채영복 박사

한일월드컵 축구 개막 해인 2002년 1월, 드디어 대한민국의 과학 수장, <제4대 과학기술부 장관>에 취임한다.

재임 기간, 한국과 프랑스 생명과학 공동 연구에 큰 의미를 갖는 '한국파스퇴르연구소'가 국내에 개소, 과학기술 교류 협력에 기여한 공로로 후일,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종 도뇌르(Legion d'honneur)'를 받는다.

'영광의 군단'이란 뜻의 '레종 도뇌르'는 나폴레옹 1세가 제정한 이래 프랑스 정부가 사회 각 분야에 공적을 쌓은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훈장으로 한국 과학자 최초의 수상이다.      

채 장관 주도로, 파리 파스퇴르연구소와 KIST간의 협력을 통해 설립된 '한국파스퇴르연구소'는 결핵, B형 간염, 조류독감(AI), 코로나19(COVID-19) 등 감염병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특히 '한국파스퇴르연구소'에서 2008년 분사한 바이오벤처기업 '큐리언트(2016 코스닥 상장)'는 다제내성 결핵치료제 '텔라세벡(Telacebec)'을 개발, 최근 결핵치료제 개발 전문 국제기구인 TB얼라이언스와 기술이전 계약(MTA)을 체결하기도 했다.

결국 채 박사로 인해 다제내성 결핵치료제 개발의 계기가 마련된 것으로 "임상에는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지만 정부 지원이 충분치 않다"면서 "세계적으로 연간 150만 명이 사망하는 결핵 퇴치를 위해 정부 지원이 절실하다"고 채 박사는 강조한다.

채 박사는 지금도 지난 2009년 창립한 원로 과학자 모임인 ‘원정연구원’ 이사장을 맡아 지난해까지 16차례 과학 포럼을 개최했다.          

80년 대 한국화학연구소(원)에서 기획부장, 행정부장 등으로 20년 가까이 채 박사와 함께 했던 이종옥 원정연구원 이사는 채 장관에 대해 많은 후일담을 전한다.

                                                   왼쪽 첫 번째 이종옥 원정연구원 이사
                                                         왼쪽 첫 번째 이종옥 원정연구원 이사

"열심히 연구하는 연구원에게 연구비를 몰아주면서 연구실도 예고 없이 방문해 격려한 반면, 야단을 맞는 연구원들도 있었어요! 요즘 같으면 인기(?) 떨어질까 눈치만 볼 텐데요!" 그리고 "40여 년 전 당시에는 기관장이 차에서 승하차 때 차량 문을 열고 닫아주는 것이 상례였는데 절대 못하게 하셨죠!"

"또 생각나네요! 당시 연구소장 판공비가 월 100만 원, 지금 화폐가치로 따지면 4-500 이상 되겠네요! 거의 안 쓰시고 정부 예산 따오면 보태 쓰라고 하신 것이 기억나네요!"

"또, 10년 이상 기관장으로 재직하다 보니 누가 샘이 났는지, 감사원에 투서를 해 감사반이 내려왔죠!" 

"결과요? 하하하! 감사 결과 전혀 흠이 없고 재직기간 판공비도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연구비로 내놓고, 출장여비 신청도 않고 자비로 사용하신 것을 확인한 감사반은, 꼬투리 잡으려고 왔다가 오히려 '표창 상신하라!'고 했다니까요!"

"또, 업무차 국회를 방문하셨다가 귀소하시면 이력서를 잔뜩 주시더라고요! 제가 짐작하기로는 국회의원들의 취업 청탁 같은데, 주신 이후에는 한 번도 이에 대해 묻지 않으셨어요! 국회의원들께 밉상 보일까 속으로 걱정했는데 오히려 네 차례나 연임하시더라고요!" 

지금의 '한국화학연구원'은 채 박사가 연구소를 떠난 후 업적을 기리기 위해 '채영복 우수논문상'을 제정, 매년 9월 창립기념식 행사에서 시상하고 있다.

채 박사는 10년 이상 몸담았던 화학연구원에 유독 사랑과 감회가 깊다.

앞으로 3년 후 연구원은 창립 50주년 반세기, 자신도 九旬을 맞는 채 박사는, 최근 한국화학연구원이 국내 최초로 전남 여수에 설립하는 탄소중립 실증 전문조직인 '탄소중립 화학공정 실증센터'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정도로 애증이 깊다. 

대한민국 과학과 함께한 한 평생!    

87세의 老과학자 채영복 박사는 "미래 동량인 청소년들이 과학을 기피하고 의대로 가게 만든 이유 중 하나는 대우"라면서, "밤을 밝혀가며 연구과제와 씨름하는 연구원들의 의욕을 북돋아 주는 다양한 비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과학기술계를 끌고 가는 축은 산업계와 공공기관, 학교로 세 축의 균형이 바로 서야 한다"면서 "과학자들도 자신들의 노력 하나하나가 국가 발전을 위한 중요한 열쇠라는 것을 되새기고 대한민국 미래 세대들을 위한 선구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명감을 가져달라"고 당부한다. 

"남은 여생은 대한민국 과학발전을 위한 밀알이 되고 싶다"면서 후배 과학자들을 향해 파이팅을 외치는 老과학자의 분투가 오늘따라 더 환하게 빛나 보인다.

* 채영복 전 과학기술부장관은 
1937년 5월25일 강원도 철원 출생. 서울대 문리대 화학과 / 독일 뮌헨대 대학원 화학 Diplom / 독일 뮌헨대 대학원 유기화학 박사 /
독일 막스플랑크 세포화학연구소 연구원 / 미국 뉴욕대 의대 생화학과 연구원 /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유기합성연구실 실장 / 응용화학연구부 부장 / 한국화학연구소(현 한국화학연구원) 소장(82년-93년) / 대한화학회 회장 / 한림원 사무총장 /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부회장 / 기초기술연구회 이사장 / 대통령 과학기술자문회의 자문위원 /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자문위원 / 제4대 과학기술부장관 / 한양대 자연과학대 석좌교수 / 제15대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 경기바이오센터 이사장 /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이사장 / 상지학원 이사장 


상훈으로는 국민훈장 동백장/ 국민포장 / 3.1문화상 / 운경상 / 효령상/ 프랑스 정부훈장 Legion d,honneur/ 청조근정훈장 


가족으로는 부인 김경자 여사와 2녀(대학교수, 프리랜서) 큰 사위는 서울대 화학과 교수 / 작은 사위는 외국계 대기업 재직 손주는 2명으로 장녀는 채 박사와 서울대 동문

<대담 박붕준 충청헤럴드 회장>

저작권자 © 충청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