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을 여니 아내가 벌써 일어나 호박 덩굴이 타고 자라나도록 울타리에 끈을 매주고 있다.퇴비 더미에서 자라난 것을 보면 작년에 버린 호박씨가 발아한 것 같은데, 아내는 그 개똥 호박에서 어떤 열매가 열리는지 궁금한가 보다.봄철에 시장에서 사다 심었던 애호박은 한동안 정신없이 열매를 맺어서 아침저녁으로 먹고 이웃에 나누어주기 바빴는데 이젠 수꽃만 피고 어쩌다 핀 암꽃은 열매로 자라나지 못한다.오이도 이제는 열매가 잘 열리지 않고 그나마 열리는 것은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할머니 등처럼 꼬부라진다.제 할 일을 다 해 캐어버리자고 했더니
나뭇잎이 부쩍 자라 숲이 무성해지면서 앞산이 일곱 가지 초록색으로 물들었다.소나무와 전나무, 참나무 그리고 산벚나무가 제각기 다른 초록으로 봄의 숲을 그려놓아 먼 곳에서도 금세 알아볼 수 있다.참나무 그늘에서 시들어 가는 진달래꽃 뒤편에 철쭉꽃 봉오리가 부풀고 있다.삶을 다시 시작하는 새로움이 경이롭고, 화사한 꽃을 만들어내는 푸르름이 싱그러우며, 고사리 같은 잎이 기지개를 피며 하늘에 수를 놓는 기적의 계절이 빠르게 지나고 있다.이맘때가 되면 푸릇해지는 나무와 숲속 오솔길 가에 피어난 귀여운 꽃을 보러 산을 오르곤 했다.긴 산행
양지바른 돌 밑에 제비꽃이 무리 지어 피어났다.아무리 많은 꽃이 있어도 제비꽃만큼 사랑스러운 것은 없을 것이다.제비처럼 하늘로 날아갈듯한 자태와 보석보다도 고운 보라색 꽃을 누가 흉내 낼 수 있을까.권오분 작가는 결혼식에 제비꽃으로 부케를 만들어 들었다고 한다.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자라던 열매가 익으면 하늘을 보며 세 갈래로 갈라져 황금색 씨앗이 태어나는데, 자그마한 그릇에 밥을 해놓은 것 같아 먹음직스럽다.제비가 돌아올 무렵에 꽃 핀다고 하여 제비꽃이라 불린다고 한다.예전엔 제비가 초가집 처마 밑에 진흙으로 집을 지어놓고 새끼 키
겨울 준비로 나무를 손질할 때가 되어 부쩍 자라난 산수유 가지를 쳐주니 그동안 산수유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던 노란 꽃송이가 눈에 들어온다."저거 뚱딴지 아니야?" 아내가 묻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맞아! 뚱딴지같아. 그런데 저기에 웬 뚱딴지?" 속초에서 전원생활을 하는 후배가 있다.은퇴 후 처음에는 우리처럼 주말에나 가서 밭을 돌봤는데 그곳에 정이 들어 요즘은 대부분 날을 속초에서 지낸다고 한다.아무리 전원을 좋아한다고 해도 평생 도회지에서 살던 사람이 막상 시골에 가서 적응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터인데 가끔 전화하면 항
바지런한 붉은머리오목눈이가 고추나무 가지 사이를 다니며 먹이를 찾기에 바쁜 아침이다. 늦털매미가 추운지 "씨익 씩 씩" 하며 푸른 하늘을 가로막은 참나무에 숨어서 새벽부터 시끄럽게 울어댄다. 까불며 뛰어다니던 메뚜기도 드문드문 보이고 메뚜기를 잡기 좋아하던 사마귀도 오간 데 없다. 이슬 먹은 앞뜰을 거니는 아내가 가을꽃과 하나가 되었다. 옆집에 나누어 주겠다며 구절초와 노란 국화꽃을 따기에, 나도 아직 남아 있는 산비장이 꽃과 싱싱한 애플민트 줄기를 꺾으며 거들었다. 가을 향기가 다정한 이웃까지 전해졌으면 좋겠다. 언덕뜰에 오르니
가을이 깊어가니 산국이 피어나 온 세상이 노란색으로 물들었다. 우리 뜰에도 온 군데서 산국이 꽃 피어 그윽한 향기를 뿜는다. 꽃내음에 취하니 마음은 자꾸만 옛 시절로 도망가서 추억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대학 시절에 가서 머문다. 어머님은 임진강 가의 작은 마을에서 살고 계셨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찾아가면, 사 들고 간 《소년중앙》을 기다리고 있는 여동생이 있었다. 둘은 자전거를 타고 코스모스와 산국이 만발한 길을 따라 깊어가는 가을을 달려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을 오르곤 했다. 강 건너 민간인이 드나들 수 없는 곳에선 단
가을이 깊어가니 초가을에 피기 시작한 참취 꽃이 제 할 일을 다 하여 시들어 가고 그 사이를 비집고 자라난 등골나물에서 꽃이 만발했다. 등골나물은 산야에서 비교적 흔하게 보이는 식물로 우리 언덕뜰에도 여기저기 저절로 자라서 한동안 부산하게 꽃 피운다. 잎맥의 두드러진 모양이 등골처럼 생겼다고 해서 등골나물이란 이름을 가졌다고 하는데, 이름을 들으면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 같아 맘에 안 들고, 너무 잘 퍼져 참취밭을 망쳐놓기에 뽑아버리기 바쁘다. 꽃이 그리 화려해 보이지는 않으나 꽃꿀이 많은지 온갖 나비와 곤충들이 좋아해서 언덕뜰 가장
탐스럽게 생긴 붉은색 꽃송이를 한적한 산길에서 만났다. 엉겅퀴처럼 생겼는데 전체에 가시가 없고 줄기가 연약해서 바람에 쉽게 흔들렸다. 처음 보는 꽃이라 이름을 찾아보니 '산비장이'라고 한다. '비장'이란 단어가 생소했는데 조선 말기의 한글 소설인 《배비장전》은 배 씨 성을 가진 비장 직책의 무관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니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비장은 마을을 지키는 순찰 비슷한 직책이니 산비장이는 산 지킴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숲속에 우뚝 서서 꽃 피는 모습을 이름으로 잘 표현한 것 같다. 씨앗을 받아다가 앞마당에 뿌렸더니 다행
새벽에 고라니 우는 소리에 깨어나서 잠을 설쳤다. 고라니 울음소리는 맹수가 우는 것처럼 크고 섬뜩하다. 울타리에 막혀 들어가지 못하는 우리 정원을 내려다보고 속상해서 울어댔나 보다. 우리 시골집 바로 옆 참나무 숲은 고라니 세상이어서 대낮에도 숲속을 거니는 녀석들이 가끔 보인다. 숲에서는 늦털매미가 금속악기 소리로 한 음만 계속 낸다. 처음에는 조금 시끄럽게 느끼는데 일을 하다 보면 금세 소리를 잊어버린다. 온종일 일을 해도 지루하지 않은 계절이 왔다. 고라니가 거니는 참나무 숲 아래 언덕뜰에 부쩍 자란 참취가 줄기 끝에 수십 개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