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에 하얀 꽃송이가 꽃줄기 끝에 달린다. 반 그늘진 곳에서 잘 자란다. 어린순을 취나물이라고 하며, 주로 씨앗으로 번식한다.

새벽에 고라니 우는 소리에 깨어나서 잠을 설쳤다. 고라니 울음소리는 맹수가 우는 것처럼 크고 섬뜩하다. 울타리에 막혀 들어가지 못하는 우리 정원을 내려다보고 속상해서 울어댔나 보다. 우리 시골집 바로 옆 참나무 숲은 고라니 세상이어서 대낮에도 숲속을 거니는 녀석들이 가끔 보인다. 숲에서는 늦털매미가 금속악기 소리로 한 음만 계속 낸다. 처음에는 조금 시끄럽게 느끼는데 일을 하다 보면 금세 소리를 잊어버린다. 온종일 일을 해도 지루하지 않은 계절이 왔다. 

고라니가 거니는 참나무 숲 아래 언덕뜰에 부쩍 자란 참취가 줄기 끝에 수십 개씩 아담한 꽃송이를 달고 가을을 반긴다. 봄에는 향긋한 순을 따먹으며 즐겼는데 아름다운 꽃으로 가을을 시작하게 해주니 올 한해도 고맙다. 감사한 마음을 전해야 할 터인데 내 말을 알아들을지 알 수 없어 음악으로 대신해야겠다. "9월이 오는 소리, 다시 들으면, 꽃잎이 피는 소리, 꽃잎이 지는 소리"로 시작하는 패티김의 '9월의 노래'가 떠오르고, 노르웨이의 웅대한 협곡이 울리는 듯한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도 좋을 듯하다. 패티김의 구슬픈 목소리는 한더위를 버텨내며 고운 꽃 피운 노고를 위로하기에 좋을 것 같고, 매혹적인 피아노 선율은 가을 향연을 시작한 꽃들에 벌나비가 될 것 같다. 

만발한 참취 꽃이 돌콩 넝쿨에 감겨 엉망이 됐다. 넝쿨을 걷어내려고 잡아당기려니 예쁜 참취 꽃이 다 떨어질 것 같다. 가느다란 넝쿨을 쫓아가서 뿌리를 뽑아내야 하는데 줄기를 뱅뱅 감고 자라서 뿌리 찾아가는 것이 미로를 걷는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못된 녀석이 콩 꽃처럼 앙증맞은 꽃을 줄기에 옹기종기 달았다. 꽃이 지도록 그냥 놔두면 꼬투리 속에 콩 닮은 동그란 열매를 키워놓을 터이다. 작지만 콩과 비슷한 영양가를 가진 돌콩 열매를 예전에는 식량으로 했다고 한다. 콩의 원산지가 한반도이고 콩의 조상을 돌콩으로 보는 견해가 크다. 그렇다고 이 녀석들을 그냥 놔두면 씨앗이 사방으로 튀어 나가 내년엔 언덕뜰이 돌콩밭이 될 것이다. 꽃핀 식물에 손을 못 대는 것이 내 약점이지만 이 녀석들만은 안 되겠다 싶어 참취 사이를 기어 다니며 돌콩 색출 작전을 벌였다. 힘든 허리를 펴서 호수와 앞산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어느새 가을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안진흥 작가 캐리커처
안진흥 작가 캐리커처

작가 안진흥은 서울대학교 식물학과를 졸업하고 캐나다에서 대학원 과정을 공부했다. 
워싱턴주립대에서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귀국 후 포항공과대학교와 경희대학교에서 식물을 재료로 분자생물학 연구를 수행하였다. 
생산량이 증가하고 품질이 우수한 벼 품종 생산을 위하여 다양한 유전자를 발굴하고 보급하였다. 

대한민국학술원 및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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