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에 진한 홍자색 꽃송이가 줄기 끝에 달린다. 습기가 충분하고 햇빛이 잘 드는 곳에서 자라며, 열매로 번식한다.
초가을에 진한 홍자색 꽃송이가 줄기 끝에 달린다. 습기가 충분하고 햇빛이 잘 드는 곳에서 자라며, 열매로 번식한다.

탐스럽게 생긴 붉은색 꽃송이를 한적한 산길에서 만났다. 엉겅퀴처럼 생겼는데 전체에 가시가 없고 줄기가 연약해서 바람에 쉽게 흔들렸다. 처음 보는 꽃이라 이름을 찾아보니 '산비장이'라고 한다. '비장'이란 단어가 생소했는데 조선 말기의 한글 소설인 《배비장전》은 배 씨 성을 가진 비장 직책의 무관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니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비장은 마을을 지키는 순찰 비슷한 직책이니 산비장이는 산 지킴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숲속에 우뚝 서서 꽃 피는 모습을 이름으로 잘 표현한 것 같다. 

씨앗을 받아다가 앞마당에 뿌렸더니 다행히 한 포기가 자라나 꽃 피웠다. 씨를 받아 다시 뿌렸는데 발아율이 매우 낮았지만 몇 해를 거치니 이젠 여러 포기가 되어 앞뜰 한 자락을 풍성하게 채웠다. 저녁에 찬바람이 일 때가 되면 꽃줄기를 길게 키우고 그 끝에 탁구공보다도 더 큰 꽃송이를 고풍스럽게 피우고는 온갖 곤충을 불러들이며 우리 뜰을 부산하게 만든다. 산비장이 꽃이 피어나니 내 마음을 지켜주는 친구가 찾아온 것 같아 가을이 되어도 쓸쓸하지 않고 세월 가는 것이 마냥 야속하지는 않다. 

산비장이 사이로 방동사니가 부쩍 자라서 꽃 같지도 않은 꽃을 볼품없이 피운다. 방동사니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훨씬 크게 자라는 왕골을 외증조할아버지께서 키우셨다. 왕골을 키우던 논은 외증조할아버님이 기거하시던 사랑채 옆에 있었는데, 안마당 우물에서 사용하고 버린 물이 흘러내려 가서 물이 항상 고여 있었다. 왕골논에는 개구리가 많았었는데 개망초 꽃을 따서 강아지풀 줄기 끝에 꽂은 후 낚싯대처럼 논에 드리우면 개구리가 뛰어 올라왔다. 어린 내 키보다 왕골이 커지면 다 자란 줄기를 잘라 여러 갈래로 갈라서 돗자리를 만드는 데 쓰셨다. 

외증조할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뒷동산에 올라 칡넝쿨을 걷어다가 여물을 삶는 커다란 가마솥에 삶은 후 줄기 속껍질을 벗겨 꼰 노끈을 틀에 넣고 돗자리를 만드셨는데, 노끈 사이로 왕골 줄기를 긴 막대로 밀어 넣는 일은 가끔 내 몫이었다. 몇 날에 걸쳐 공들여 만든 돗자리를 메고 서울에 사는 작은 아들 집에 가시던 외증조할아버지 모습이 떠올라 못생긴 방동사니를 뽑아버리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고 만다.

 

안진흥 작가 캐리커처

작가 안진흥은 서울대학교 식물학과를 졸업하고 캐나다에서 대학원 과정을 공부했다. 

워싱턴주립대에서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귀국 후 포항공과대학교와 경희대학교에서 식물을 재료로 분자생물학 연구를 수행하였다. 
생산량이 증가하고 품질이 우수한 벼 품종 생산을 위하여 다양한 유전자를 발굴하고 보급하였다. 

대한민국학술원 및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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