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38살! 30대 청년 이재선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정치라는 단어보다 사회 현실에 관심이 많았던 특이한 아이였다.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 시절 대전으로 이주, 무명의 새내기 정치인이 당시 대한민국 정치를 흔들던 거물 정치인을 누르고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을 본 후 '국민들이 한마음이면 변화를 시킬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된다.        

그러나 정치에 관심이 있다고 모든 것이 자신의 마음대로 순탄하게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아 청년으로 성장하면서 개인 사업부터 시작하며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정치권에서 호출, 본격적인 정치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다.

대전에서는 단, 한 번만 찍어(?) 재선은 잘 안 시켜준다는 대전시민들의 투표 전통(?)을 깨고 3선 국회의원, 그리고 이후 현재까지도 대전 출신 국회의원은 전혀 배출하지 못한 '국회보건복지위원장' 자리까지 오른다.

대전 서구을 주민들의 부름을 받지 못한 이후에는 수 년째 대전지역 정치권 밖에서의 은둔생활로 팬(?)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는 이재선 전 의원(이하 의원)을 만나본다. <편집자 주>

1956년, 충청남도 보령군(현, 보령시) 남포면 소송리에서 4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난 이재선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를 따라 대전으로 이주, 대전 동구 자양초등학교로 전학한다.

보령 시골마을 촌뜨기(?) 였지만 도시의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며 대전시민으로 뿌리를 내리기 위한 돛을 올린다.  

시골에서 왔지만 도시 보통 평범한 아이들과 달랐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냥 지나치지 않고 질문하면서 궁금증을 해소하고 결과물을 얻어 성취감을 느끼는 스타일이었다.

나이 12살, 초등학교 5학년 시절, 천진난만한 개구쟁이 이재선은 "나이에 관계없이 존중을 통한 인격의 대우"를 주창한 '요한 페스탈로치' 위인전을 읽고 그의 교육론에 감동을 받는다.

요한 페스탈로치

그때가 대전 이주 3년째로, 동구 대동 산 1번지 골목길을 오르내리며 담벼락에 부착되어 있는 선거 후보자들의 벽보를 보게 된다.

당시 여당은, 박정희 대통령의 민주공화당이었고 그때는 어릴 때로 정당도 몰랐지만 김용태(이하 YT)라는 이니셜만 어른들에게 귀동냥으로 들어 대단한 아저씨라는 생각만 했었던 것!

지금은 고인이 된 'YT'는 5선 국회의원에 집권당 원내총무, 장관까지 지낸, 당시 대한민국 정치판 최고의 권력자 중 한 명으로 상급학교에 진학해서야 정치판의 맹주라는 존재를 알 수 있었다. 

동신중학교를 거쳐 대신고를 졸업한 청소년 이재선은 "아이들이 스스로 세상을 발견하고 그것에 관해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관념에 기여한 페스탈로치 교육관 영향이 뿌리 깊어 경영학박사 학위까지 취득하는 계기가 된다. 

대학 졸업을 앞둔 시절, 청년 이재선은 어릴 때부터 품었던 정치에 대한 관념을 재정립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귀빠지게(?) 들었던 'YT'가 5선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여당 후보로 나섰던 것!

1978년 당시에는 국회의원 선거가 지금 같은 소선거구제가 아닌, 선거구에 따라 2등까지 뽑는 중선거구제로 고무신과 설탕, 막걸리를 유권자들에 나눠주는 금권선거가 판쳐, 자연히 여당 후보인 'YT'가 1등 당선이라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을 때!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YT'가, 지명도가 낮았고 소속 정당도 없던 무소속 임호 후보에게 밀려 2등으로 가까스로 당선, 망신살이 뻗친다.

당시 선거는 지역 정치 원로였던 박병배 전 의원도 4위로 밀어내 낙선하는 대 이변이 일어난 것.

당시 새 정치를 갈망하던 22살 청년 이재선은 대학 졸업 후 지역에서 개인 사업을 하면서 청년 봉사단체 '대전JC 회장', '충남테니스협회장'을 맡아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인다.

당시 대한항공 창업주로 한국테니스연맹 중앙회 조중훈 회장이 이재선 충남 신임회장 추인 과정에서의 에피소드!

조중훈 중앙회장 왈(曰)!
"이재선? 서류에 몇 살이라고 되어 있는 거예요? 28살? 주민증 잘못된 것 아냐?"

전국 지방의 테니스협회 회장 나이가 40대 후반이나 5, 60대가 보통이었지만 28살 나이에 회장 후보라고 추인 결재가 올라왔으니... 

요즘 같으면 놀라서 젊은이 은어로 "헐"이라고 했을지 모르지만 당시엔 서류에 기재된 나이를 타자(공병우 타자기)로 기입하던 시절로 오타로 착각했던 것.  

약관 20대 청년 이재선이 테니스협회장을 맡게 된 것은 전국체전 때 충남선수단에 고기(?)를 실컷 먹여 체력을 비치, 금메달을 따야 하는데 독지가가 없어 떠밀려 직을 맡게 됐다는 후문이다.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치면서 지역 기관장이나 유지들을 자연스럽게 접하는 계기가 잦아져 발이 넓어진(?) 만 38살 청년에게 정치권의 러브콜이 온다.    

자유민주연합(자민련)에 입당, 충청권의 맹주, 김종필 총재의 특별보좌관에 임명되면서 꿈에 그리던 정치 초년생의 첫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러고는 정치 입문 단 1년 만인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대전광역시 서구 을 선거구에 출마, 당시 신한국당 염홍철 후보를 꺾고 당선되는 기염을 토한다. 

이 여세를 몰아 30대 청년 이재선은 당 부대변인, 원내부총무 등 주요 보직을 맡는다.

지명도가 높아진 이재선은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 당선되면서 재선 의원의 위상을 뽐낸다.

당시까지 대전에서는 한 명도 재선 시장이 나오지 못했고 국회의원도 연속 재선이 없었지만 이재선은 40대 초입에 재선의 고지에 오른 것.

그때 대전에서는 이재선 의원의 이름이 "'재선'이기 때문에 재선됐다"는 유머가 퍼져 이름을 차라리 삼선(3선)이라고 지으면 차기 선거에도 당선될 것이라는 여담이 회자되기도 했다. (4년 후 이 여담이 현실로...)          

여하튼 이 의원은 재선의 타이틀로 2002년부터 2004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윤리특별위원장을 역임했다.

대전지역에서 배출된 수많은 국회의원 중에도 3선 이상 정치인은 단 몇 명에 그치고, 대전 출신이 국회상임위원회 보건복지상임위원장을 맡은 것도 이재선 의원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전혀 배출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지역발전을 위한 활동에도 2004년 특정 정당의 바람이 불어 고배를 마시자, "재선이라는 이름을 삼선으로 지었으면 3선 의원이 됐을 텐데!"라는 4년 전 여담이 현실로 나타났다.

그러나 청년 정치인 이재선은 '재선' 이름에 얽힌 여담을 말끔히 씻어 내고 4년 만에 권토중래, 2008년 18대 국회의원에 다시 당선, 재선의 이름으로도(?) 3선의 고지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이후 두 차례 선거에서 특정 정당 바람몰이 몰표 투표의 희생양으로 고배를 마시고 2017년 말 당협위원장을 내놓고 탈당, 지금까지도 평범한 대전시민으로 돌아와 자신의 지역구였던 대전 둔산동에서 생활하고 있다. 

대전시민 이재선은 둔산동 '한밭수목원'을 지날 때마다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흐른다.

의원 시절, 허허벌판이었던 현재의 한밭수목원 자리에 월드컵경기장을 건설하려는 계획을 막고 도심정원 조성을 주장, 120억 원의 국비까지 따내 도심 속의 녹색공원, 둔산동 '한밭수목원'을 탄생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당시 전국 16개 시도가 수목원 조성에 따른 국비를 신청했는데 보건복지위원장의 끗발(?)로 유일하게 대전 한 곳만 승인토록 해 남달리 더 애착이 깊다.

"만약에 그때 자주 활용하지 않는 월드컵경기장이 지금의 둔산동 '한밭수목원' 자리에 들어섰다면 둔산이 회색도시로 전락할 뻔했죠!" 

이재선은 또, 대전시가 '대전예술의전당'을 건립할 때 국비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에 100억 이상의 국비를 확보, 성사시켰다.

또, 대전 중구 안영동 전국 유일의 효 테마공원인 '뿌리공원' 대전 유치도 보건복지위원장 직책을 걸고 260억의 국비를 확보한 이 의원의 땀의 결실이다.

당시 후보지로 경남 진주가 유력했지만 대전 출신 국회 보건복지위원장은 다른 지역의 결정에는 방망이(의사봉)를 두드릴 수 없다는 신념으로 밀어붙여 뿌리공원이 전국에서 찾는 '孝명소'로 자리매김 한 것이다.

이 밖에도 보건복지위원장 중책을 활용, 충남대병원에 '재활의학센터' 설립을 주도했고, 이보다 앞서 초선 의원 시절, 대전의 한 사립대학 부지 활용 민원을 중간에서 해결, 주민들의 정주권 확보가 가능토록 해 지금의 활기찬 동네를 조성했다.

패기의 젊은 프로 정치인 3선 국회의원 이재선은 지금은 평범한 보통시민으로 대전을 한 번도 떠나지 않고 우리 곁에 함께하고 있다.

그러나 대전에 대한 애정은 숨길 수 없나 보다.

"지금 이장우 시장님은 빠른 결정과 추진력으로 일도 잘 하는 것 같다"고 높이 평가한다.

그러면서 "지역경제 활성화와 젊은이의 탈 대전을 막고 오히려 전입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대기업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여러가지 미끼를 던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산단' 조성은 아주 잘된 일이고 이왕이면 조기 조성되도록, 현 지역 국회의원들이 시장과 정당은 다르지만 대전 발전을 위한 것은 한마음이 돼야 한다"면서 "활발한 국회 활동으로 대전시장을 적극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보통시민 이재선은 이와 함께 대전 발전을 위한 한 가지를 제안하는데 바로 유성구 자운동의 '군부대(자운대) 이전'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공군비행장이 있던 둔산이 지금의 신도심으로 거듭난 것처럼, 지난 92년 조성된 유성구 자운동 일대의 교육 훈련시설인 자운대 군 시설을 이전, 그 자리에 국내 대기업들을 입주시키는 등 주거 복합시설을 조성하면 대전이 둔산, 도안에 이어 또 한 번 웅비할 수 있다는 것!

보통시민 이재선은 "자운동은 고속도로와 인접, 물류 수송 장점과 군부대 입주로 침체된 이 지역을 신도시로 조성하면 감소하는 대전 인구의 유입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비록 정치권을 떠나있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대전에서 자라 지금도 대전에 대한 애정은 변함이 없다.  

이재선 의원 노인복지대상 수상

지역 정가에서는 "이재선 의원이 정계 은퇴를 하지 않았냐?"고 얘기하는 소리가 들리지만 "정계 은퇴라는 얘기는 스스로 한 번도 밝힌적이 없다"는 대전시민 이재선! 

5년 전 지병(구강암) 발병으로 건강이 나빠져 대외 활동을 쉬고 있을 뿐, 이제는 거의 완쾌되어 정상적인 생활을 위한 힘찬 시동을 걸고 있다.

"만 나이 계산법이 바뀌어 저는 두 살이나 더 어려졌네요! 제 나이 맨 앞에 '7'자가 오려면 아직도 한참이나 남았고 마음은 더 젊죠!"

"앞으로도 대전 발전에 밀알 역할을 하고 싶다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저는 무소속입니다", "대전시민 여러분도 거의 다 무소속이시죠?"

자신감이 넘치는 보통시민 이재선 3선 국회의원의 경륜과 능력으로 대전시가 더 크게 웅비할 것을 기대해 본다.

*이재선 전 국회의원은
1956년 12월 19일 보령군(현 보령시) 남포면 소송리 출생      
대전대신고 / 한남대 경영학 박사 /
국회의원 3선(15, 16, 18대 대전 서구을) / 국회보건복지위원회 위원장 / 국회중소기업위원회 특별위원장 / 국회윤리특별위원회 위원장 / 국회월드컵특별위원회 위원장 / 새누리당 지방자치특별위원회 위원장 / 자유선진당 최고위원 / 새누리당,자유한국당 대전 서구을 당협위원장 / 대전사회복지협의회 회장 / 대전생활체육협의회 회장 / 한남대학교 총동창회장 / 대신고등학교 총동창회장 / 대전.충남테니스협회장 / 대전JC 대전지구 초대회장 / 한국복지재단 대전지부 후원회장 / 대전경실련 집행위원

 

상훈으로는 대한노인회 노인복지대상

 

가족으로는 부인 연미흠(약사) 여사 사이에 2남 1녀

가톨릭 신자로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대담 박붕준 충청헤럴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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