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었다풀도 나무도 자라지 않는 사막 한가운데 서 있었다터번에 둘둘 말린 검은 해가 지쳐 떨어지면 독오른 전갈의 꼬리 끝으로 별이 뜨는 곳 별을 보며 수를 셌다지은 죄를 더하여 헤아려본다 별은 흐르는 강물 죄는 강을 떠도는 나룻배 밤마다 세었던 양의 마릿수와 죄의 수가 뒤엉켜 표류했다 허우적대다 움켜쥔 허공에 허구한 날 친구 찾고 술 즐겨 속 끓이던 아들 환한 미소가 걸려 있다 나를 닮은 딱,그것이었다 [작품 해설]지난주에 국제한국시낭송대회 개최를 위해 일본 오사카에 다녀왔다.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하면서 자영업의 가족경영이나
음력 칠월, 보름장은 유난히 더웠다삼방(蔘房) 골목으로흘러가는 장꾼들지난 장 밑도는 시세 다툼바람 한 줄기 돌지 않는다웃음과 한숨 뒤엉켜 흐를 때봉황천 물은 조심조심 기어내리고우시장에선,소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쇠전다리 건너 찢어진 포장튀밥 기계를 안고 있는 사내는몇 줌 옥수수 거짓처럼 부풀리며화덕의 불 목숨처럼 가꾼다시든 햇살도 쓰러지고진안행 막차가먼지를 퍼붓고 떠난 후어스름 장터,씀바귀 줄기 흰 물 맺히듯돋아나는 별무리져 내리는 별빛만쉬지 않고 풀리는 샛강에몸을 담근다 [작품 해설]1980년 나의 20대 초 광주에서 시작된
창가에 놓인 화분처럼 앉아서 우린 구부러진 골목을 바라봤지요이삿짐 트럭 옆으로 배달 오토바이 옆으로 가로등이 켜지고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해요우리 여기서 살 수 있을까요 살아남은 책장 한 모퉁이에 널어놓은 빨래가 다 마를 때까지 거기 누구 없나요 외쳐도 열리지 않는 이웃집 대문이 있어요꾹 눌러놓은 빨래집게 같은 사람들내 것이 아닌데 내 것처럼 보이는 열쇠를 쥐고 고층으로 올라가 구멍 찾는 흉내라도 내야죠 한쪽으로 휩쓸려 가더라도 겁내지 말고 옆에 앉아요 [작품 해설]콧대 높은 도시의 아파트는 늘 위를 향해 있다. 그 안에서
가을날 흔들리면서 떨어지는 나뭇잎에선시 읊는 소리가 난다가만히 귀 대고 들여다보면바람이 한 묶음 들어 있는 것 같고자세히 들여다보면햇살이 빼곡히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은행잎 위엔 은행잎만큼단풍잎 위엔 단풍잎만큼그리고 참나무 잎엔 참나무 잎만큼오늘은 나뭇잎 위에 앉은 바람이자꾸 시 읊는 소리를 내고 있다나뭇잎이 노랗게 물드는 소리나뭇잎끼리 속설 부딪는 소리나뭇잎끼리 깊은 사랑에 빠지는 소리아 그래 이제 알았다너희들도 11월엔 시를 읊는구나흔들리는 만큼물드는 만큼서로 사랑하는 만큼시를 읊는구나시를 쓰는 11월의 바람 소리11월엔 바람소
어머니는 집 가까운 콩밭에 김을 매시고 저녁이 되어서야 맨발로 호미와 고무신을 들고 돌아오셨지요. 우물가 빨랫돌 위에 고무신을 닦아 놓으시고, 하루의 피로를 씻으시던 저녁, 땅거미가 내릴수록 더욱 희게 빛을 발하던 어머니의 고무신. 어머니의 땀 밴 하루가 곱게 저물면 이제 막, 우물 안에는 솔방울만한 별들이 쏟아지고 갓 피어난 봉숭아도 살포시 꽃잎을 사리는 것이었지요.지금 우물은 자취 없이 사라지고 말았는데, 싱싱한 꿈 길어 올릴 두레박줄 내릴 곳 없는데, 이제는 그곳에 서보아도 뒷산 솔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나의 저 어린 시
욕망은 늘 익숙한 위장에서 시작된다내가 아는 것 모두 버리고 새롭게 채우고 싶을 때낯선 곳으로 떠나본다제한된 삶 속에서 반복되는 날들을 살다 보면 존재 자체가 상실되고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현재가 늘 위태롭게 떠 있는 바람 둔 풍선처럼 느껴진다진실은 떨어져 보아야 선명해진다보이지 않는 것들과 살고 있는 무형의 실체변화를 느낄 땐 이미 실체는 멀리 가 있다내면에 깔린 슬픔을 하나하나 지우다 보면 보이지 않는 무한 공간으로 침식되어 간다원본이 무의미한 복제 시대에 거짓이 진실보다 더 진실이 되어 세상을 점령해 간다허지만 누구도 이의
물 위에서 뒤척이는 달을 기와 아래 책갈피처럼 끼우고오늘도 백 년의 속삭임을 정독한다오래된 책장을 넘기듯 연못을 펼치면붓꽃은 첫 문장의 머리글자,오리떼는 쉼표가 되어 물결의 행간을 가른다나는 독서대처럼 서서 배롱나무를 읽는다연꽃이 피는 페이지에 이르자다시 사랑을 믿기로 한다사라지는 이름들을 되짚으며청록색 문장 끝을 적신다바람의 자음과 연잎의 모음이 만나연분홍빛 운율로 고요가 핀다팔작지붕 아래, 오래된 슬픔을 한 줄씩 말리고새들이 떠나는 방향으로 문장은 열린다기와 그림자 따라 시간이 줄을 서면나는 물가의 순번표를 들어그리운 이도잊으려
가을을 싣고 가는 기적소리는황금빛 출렁이는 들판일 수도 있고황홀한 저녘 노을 일 수도 있다낙엽처럼 흩어지는 선창 가의 이별일 수도 있다우리가 가파른 산길을 지나등나무 우거진 농장에서바람처럼 사라지는 타인의 사랑을 실감하고이별의 현장을 목격했을 때가을을 싣고 가는 기적소리는작은 풀꽃들의 손을 흔들게 한다오늘도 장항선 하행열차의 꽁무니에는수많은 이별과 만남이 함께 어우러지고가슴과 가슴이 맞부딪힌다새로운 삶의 욕망들이 용광로처럼 솟아오르고곧은 길 굽은 길 헤쳐가며험난한 인생길을 이겨나가자 한다가을을 싣고 가는 기적소리는우리들의 슬픔과 기
서른 해 전잰걸음 뛰어다니던 맞벌이 주부비틀비틀 자전거를 처음 타시던 날“이리 편한 것을 미련스레 걸어다니느라 울 새끼덜 밥 때를 놓치고 다녔다”며 좋아하셨다시속 십오 킬로미터스물두 해 전뒤 잡아 주던 아버지 보내시고서러운 홀몸 험한 언덕길에서도사 남매를 한 번도짐받이에서 내려놓지 않으셨다시속 오십 킬로미터엊그제운동 삼아 타고 다니시는데실린 것도 없고 평탄한 길느릿한 비틀거림이 시리게도 울렁거린다시속 오 킬로미터[작품 해설]갑자기 응급실에 가셨다는 어머니의 연락을 받았다. 일찍 홀로 되신 어머니의 고난한 삶을 이루 다 표현할 수 없
누구나 살면서 행복하기를 원하지만그것은 얻는 게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깨닫는 게 아닐까그러나 사람들은 자기가 추구하는 것을 손에 넣을 때가 행복이라고 말한다사랑한다는 것은 자기를 넘어서는 여정이다엄동설한이 지난 뒷마당 구석나무들이 말라 죽은 줄만 알았다하지만 어김없이 찾아온 봄, 겨울을 버텨낸 나무가 햇살에 새순을 틔울 때그 경이로움은 내게 축복이자 행복이었다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묻게 된다이토록 피고 지는 순환 속에서우리는 과연 무엇인가날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산다고 발버둥 치고 사랑한다고 아우성치지만 결국 우리는 한 줌의
그림자 따라 걷다가빈집 앞을 지난다제 그림자 볼 수 없어 매미는땡볕 속에 소리를 쏟아낸다소리에는 그림자가 없다마당엔 풀들이 가득 에워싸고집에는 그림자 풍년이 들었다제 그늘 속에 집은턱 하니, 또 한 채의 집을 짓고마당 가득 풀을 키웠다집은 우거진 그늘 안고 누웠다이곳에 살던 사람들밖의 세상으로 떠나보내고집은 비로소 집에서 벗어나그늘 속으로 내려앉았다집을 세운 사람들 품고,낑낑대는 강아지 한 마리의 밤도아늑하게 품어 키웠다이제 새벽 별빛만 뜰팡 위로 구른다사람들이 떠나자 집은비로소 허물을 벗어버리고한 채의 그늘로 돌아가집 속에 집을
바닥에 가보면 알 수 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물의 혀가 스친 자리마다 문장이 수초처럼 자란다다시 쓰는 일은 다시 사는 일그는 오늘도 살아보겠다고먹물을 터뜨려 침묵을 펼친다검게 번지는 세상을 더듬다가움켜쥐는 대신 감싸며 붙잡는다조약돌, 조개껍데기, 병 조각, 낚싯줄죽지 않고 남겨진 것들은 작은 불빛 흔들고 심해로 가듯그도 바닥으로 가 무늬를 지운다 [작품 해설]문어의 먹물은 시인의 잉크다. 바닥에서 배운 촉감으로 침묵을 펼치며 시작하고, 움켜쥠 대신 감싸는 손길로 세계를 붙잡는다. 다시 쓰는 일은 다시 사는 일처럼 상처의 자리에서 쓰
그곳에 어머니가 계시다새벽 다섯 시 머리를 곱게 빗으시고머리엔 쌀 한 말 이고한 손엔 내 손을 잡고선수암을 향해 걷는다가는 데 사십 리 길가다 쉬고 쉬었다 가고네 시간이나 걸어 도착한덕숭산 수덕사 선수암*얼굴이 하얗게 센 주지 스님부처님과 공양 보살 한 분묵언으로 방문 보살을 맞는다아주 작은 새들과이름 모를 풀꽃들이 반긴다솔숲 가득 숨었던 바람고요 속 퍼져 나가는공양 목탁 소리잠든 숲을 깨운다오직 묵언 침묵으로도를 전하는 법당 안이 승에서 물든 귀耳부처님 말씀으로 씻는다나무아미타불나무관세음보살 [작품 해설]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보이되 보이지 않고시작도 끝도 없는 그대 영혼의 숨결처럼 다가오는,욕망의 날개인가 깨달음의 메아리인가잡히지 않기에 영원하고형상이 없기에 모든 형상을 품은 그대 삶이란 한 줄기 바람의 스침우리 안의 바람은 무엇을 품고 불어오는가 [작품 해설]바람에게 빛이 있다면 어떤 색일까? 바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보이지 않고 맛도 형체도 없지만 우리는 바람을 느낄 수 있다내 속에도 무수한 바람이 일고 있다 원망의 바람, 질투의 바람, 의심의 바람, 때때로 불어오는 희밍의 바람 등 마음의 변화에 따라 쉼없이 불어 오는 바람이 있듯이
물은 소리로만 우는 것이 아니다가파른 벼랑을 타고 내리다가큰 바위에 부딪치며 부서져물은 희게 거품을 물기도 하지만,한동안 소리 죽여 누워 흐르기도 하면서그 낮은 소리로 산 하나를 허물고 간다폭포 밑에 서면 물 떨어지는 소리 가득하나물은 소리 내지 않는 곳에서더 큰 소리를 삼키며 간다그리하여 계곡은 더 깊게 파이고물은 더욱 깊어져 날선 돌에 맨 가슴을 깎는다계곡 물이 왜 새파란 빛을 띠는지그 물에 손목을 담그면 왜 마디마디가 저린지물은 소리로만 우는 것이 아니라,온몸으로 차오르는 절망의 깊이로재울 수 없는 고통을 뭉개고 간다 [작품
선운사 절 마당 가득 붉은 울음이 매달린배롱나무가 보고 싶어서석호리 집 마당 가에 한 그루 옮겨 왔다봄이면 낯익은 새순을 세상에 들어내고백일씩이나 꽃을 피울 기대에 지금부터 마음이 셀렌다바람은 어김없이 가지 끝에서 흔들릴 거고그리움이 붉은 영혼으로 피어날지니첫여름부터 늦가을까지나는 배롱나무 그늘에서 아름다운 시간을 그릴 것이다하얀 백지 위에 슬픔을 거둬 간 많은 시간들이붉은 꽃으로 매달리도록붉은 사랑으로 꽃피우도록 [작품 해설]선운사에 가면 오래된 배롱나무가 절 마당을 지키고 있다. 여름 시작되는 그 어느 날부터 가을 입구까지 백여
완벽하면 남을 즐겁게 하지만 서투르면 자신을 단련시키는 계기가 된다 서투름이란 완벽함으로 익어가는 시간이 필요한 발효과정이다 짧은 가을 햇볕 사이로 사과 한 알 물구나무를 선다 [작품 해설]도전하지 않으면 결과는 없다, 결과도 '성공이냐 실패냐'로 구분 짓는 이원론적 사고는 절대적이지 않다. 완벽하거나 완벽해지기전의 서투름일 뿐이다. 완벽한 직립보행이란 어쩌면 땅을 딛고 서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딛고 서서 걷는 것이 아닐까? 손혁건 시인(사)한국문인협회 대전광역시지회 제15대, 16대 회장 역임 현, 국제시사랑협회 회장, (사)한국
잠들기 전에 스마트폰을 본다 잠깐 본다는 게 새벽 세 시순간의 재미가 심각한 중독이 됐다SNS, 쇼핑, 게임, 유튜브에 중독되면도파민이 많이 나오지만 결국은 뇌 손상으로 우울증 증세로 바뀐다고 한다다시는 안 본다, 안 한다, 안 열어보겠다, 다짐하고 맹세까지 하지만 딱 한 번만으로 다시 시작되는 증후 유혹이 꾀어내는 말, 딱 한 번을딱 오늘만 참자 로 부추겨 보자. 그러다 보면 소소한 것들이 다가와자극 없이도 즐거워지리라오늘 밤은 잠들기 전에 기도가 먼저 와 나를 본다 [작품 해설]누구에게나 끊지 못하는 중독이 있다 요즘은 휴대폰에
지상에서의 며칠 삶을 위해매미는 수 년간 땅 속에 묻혀 있다땅에서 부활하는 순간곧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매미는 자기 죽음에 대한 조상弔喪으로스스로 울다 최후를 맞는다기대어 울던 나무 밑이 바로 자신의 무덤이다이듬해 나무는매미의 주검을 파먹고이파리 줄창 자라나무성한 그림자로 한 여름을 덮는다 [작품 해설]여름내 매미는 스스로 울다 최후를 맞이하느니. 그가 기대어 울던 나무 밑이 자신의 무덤이다. 귀를 찢는 울음소리 속에 서서히 쇠의 성질이 옅어지더니. 끝내 그 소리통 다 비어버릴 즈음 여름은 바닥나는 것. 그러니 매미는 그 장렬한 죽음
왜 발을 동동 구르며 서 있니?곧 우리에게 펼쳐질 계단을 건반처럼 밟아보자도레미는 있고, 파가 없다그래, 파가 없는 지구는 심심한 맛이겠구나근육과 뼈가 없는 대화를 계속 하고 싶니? 빈 칸에 누워 좀 쉬었다 가자다정해지는 연습이 필요해사방에 선을 그려 넣어봐우린 식당 칸에서 파스타를 돌돌 말아 입에 넣었지못 본 척못 들은 척 하던 표정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어떤 얼굴로 사각형을 기어 나왔을까? 출구 앞에서 슬픔이 차오른다같은 이름이 우글거리는 나를 버렸다가 다시 버렸던 이름을 찾아온다여행에서 돌아온 날은 항상 구름이 많았어목욕탕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