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산업혁명시대에 급변하는 변화에 따른 ‘신기술’ 습득과 시도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창의력 발휘 직종이 대부분 그렇지만 시대에 민감하고 개인의 취향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패션디자이너들은 이 직업으로 평생 살아가기 위해서는 중단없는 연구를 해야만 한다.

소비자의 기호나 사회의 변화에 신속히 적응하지 못한다면 디자이너에 의해 결정되는 패션산업은 길을 잃기 때문이다. 

디자인 능력의 쓰임새는 옷 아이템의 디테일을 변형시키는 일부터, 패션쇼 등 브랜드의 다양한 프로젝트를 총지휘하는 앵커 역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팅 영역까지 책임이 무겁다.

따라서 디자이너의 메인 업무는 디자인으로, 디자이너에게는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재능을 가진 디자이너가 20-30대에 각종 경험을 쌓으면서 성장한다면 30대 후반부터는 최소 30년 이상을 더 웅비한 컬렉션과 디자인을 세상에 보여주게 된다.  

거의 50년 가까이 패션 외길을 걸어온 대전이 낳은 한국 패션계의 꽃, 청년처럼 에너지가 충만한 7순의 현직 패션디자이너 정훈종!

대한패션디자인협회 회장이자 ‘정훈종 패션스토리’ 대표 디자이너 정훈종의 지난날과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인생 스토리를 그려본다. <편집자 주>

'아들 딸 구별 말고 둘 만 낳아 잘 기르자!' 

계수나무에 토끼 한 마리가 산다고 믿었던 거의 70년 전 당시 '산아 제한 가족계획' 표어다.

그 당시는 소위, 보릿고개 시대로 아들 선호 사상까지 팽배, 딸만 있는 가정은 아들을 낳을 때까지 계속 순산(?)을 강요하고 아들을 낳으면 빨간 고추를 대문에 걸었던 때!

지금은 인구 1명당 출생률이 세계 최저인 0.7명으로 미국 언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얼마나 심각했으면 한국을 재조명까지 했을까?

정부가 "그만 낳아라!" 독려하던 1954년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무수리는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던 시골 동네로 이곳에서 남자아이의 힘찬 울음소리가 산골짜기에 울려 퍼진다.

세상에 나와 첫 신고한 아이는 정훈종, 지금의 대한민국 패션디자이너협회 수장이다.

정 디자이너 부모님은 정부의 지침을 대폭(?) 어기고(?) 막내 정훈종을 낳았다.

그 당시 한 가구당 평균 자녀는 4명이었지만 정훈종은 무려(?) 12남매 중 12번째 막내로 큰 형과는 23살이나 차이가 났고, 큰 조카와는 거의 동년배였다.

누나 형들에 묻혀(?) 보통 개구쟁이 막내들과 달리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품으로 명절 때 한 번은 조카들이 때때 옷(?)을 입고 오는데 너무 부러워, 호사는 아니더라도 평상시와 같은 자신의 모습과 비교될 때 소외감을 느끼기도 했다.  

지금은, 형과 누님들이 거의 타계하고 형님 한 분과 누님, 자신을 포함해 3명뿐이다.

동네 금계초등학교는 현재 전체 학생 수가 단 8명으로 금성초 분교장으로 격하됐지만 금계초 5학년 시절, 소년 정훈종은 지금의 한국을 대표하는 패션디자이너의 꿈 잉태를 위한 서막을 연다.

둘째 형 결혼식 참석을 위해 생전 처음 읍내를 찾은 꼬마 정훈종은, 그날 형수가 입었던 하얀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본 후 큰 충격을 받는다. 

'순백의 미소'를 연상하듯 하얀 드레스를 보면서 꼬마 아이는 마음속으로 '천사의 날개'를 그렸고, 이런 옷을 만들고 싶다는 동경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디자이너로서의 꿈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위해 상경한 곳이 국내 최초의 의상 전문 교육기관인 서울 신설동 '국제복장학원'이다.

​​​​​​-정 디자이너 스승 최경자-
​​​​​​-정 디자이너 스승 최경자-

1935년생인 앙드레 김(작고)이 이 학원 1기생으로 쟁쟁한 패션디자이너를 배출한 산실인 이곳에서 한국 현대패션의 선구자 최경자 스승을 만나 2년간 지도를 받는다. 

당시는 지금처럼 기성복이 거의 없던 시절로 의상실은 꽤나 호황을 누려 대전으로 내려와 자신의 이름을 딴 '정훈종 의상실'을 개업한다.

1년 반 정도 운영을 하다 29살의 늦은 나이에 군(육군 공병대)에 입대한다. 

-70년대 초반 명동-
-70년대 초반 명동-

키가 훤칠한 미남형인 정 이병은 부대에서 인정받아 헌병으로 발탁되어 당시 군대에서 꾀나 인기가 높던 검문소로 발령받았고 이를 본 부대장이 자신을 비서로 다시 발탁해 힘들다던 공병대 군 생활을 수월하게 지내며 제대하게 된다.

군 제대 후에는 서울 명동 사보이호텔 부근 건물에서 자신의 이름을 건 의상실을 열게 되는데 당시, 남자 패션디자이너는 국내에 손꼽을 정도였다.

지금처럼 대량 찍어내는 기성복이 없을 때여서 수익도 짭짤해 집도 구입할 정도였지만, 고향과 다름없던 대전생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서울을 떠나게 된다.

그 이유는 "대전에서 성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컸기 때문으로, 안정된 가정생활을 위해 1982년 강인자 씨에 프러포즈, 웨딩마치도 울려 제2의 인생의 돛을 올리게 된다.

그러나 결혼 이듬해, 자식을 위해 온갖 고생만 하신 어머니는 막내의 결혼을 보고는 이제 책임을 다하셨다는 듯 하늘의 별이 되신다.

-정 디자이너 모친-
-정 디자이너 모친-

유년 시절 어머니는 "내가 죽으면 가슴이 시커멓게 타 있을 것"이라면서 "되로 배웠어도 말로 풀어쓰는 사람이 있는 반면, 말로 배웠어도 되로 풀어쓰는 사람이 있다"고 하신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산다.

나이 마흔 되던 해, 당시 의상실은 잘 되고 있었지만 갑자기 접고 "자신이 전문적인 디자이너로서 부족하다"는 채찍질로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난다.

당시 백화점 영업(입점)을 위해 팽배했던 학벌 만능주의로 이력서가 필요했던 것도 한 이유로 소위, 스펙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

"어디에서 공부했고, 어디로 유학을 다녀왔냐"가 중요하다는 당시 주위 사람들의 말에 떠 밀리듯 유학을 갔지만, 지금 누구나 그렇듯 오직 능력으로만 인정받는 사회를 갈망한다.

"유학을 가면 안 간 것보다는 좋겠지만, 경제적 투자, 시간에 비해 크게 별다른 것은 없고 내 생각과 마음속의 아이디어, 노력이 더 크리에이티브를 창출한다"는 자신을 믿는다.

따라서 패션디자이너 정훈종은, 남다른 개성으로 자신만의 색깔을 찾는 특징으로 디자인 콘텐츠도 남들이 안 만드는 옷, 평범한 디자인을 거부하는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당시 앙드레 김 외에는 자신의 인지도가 낮아 남과 차별화된 옷을 만들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생각에 남들 다 만드는 재킷은 만들지 않았다.

대신, 원피스를 위주로 꽃과 같은 강렬한 모티브를 활용해서 틈새를 공략하면서 소재인 천은 100% 이탈리아 제품을 사용, 겨울옷을 제외하고는 한 벌에 2백만 원 안팎으로 비교적 높은 편에 속한다.

색상은 주로 검은색으로 원색의 꽃무늬를 곁들인 강렬한 작품들은 '정훈종' 마니아층을 늘려왔다. 

계절마다 디자인의 변화와 함께 자신의 작품세계를 만들면서도 시대의 흐름 역시 놓치지 않는 것은 기본으로, 꽃을 모티브로 한 공통점은 유지하고 계절마다 꽃의 형태와 색상, 모양을 바꾼다.

50년이 되도록 패션 외길을 걷고 있지만, '패션에는 앞으로도 답이 없다'는 통찰력에서 자신의 지속적인 연구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정훈종의 패션 세계를 사랑하는 마니아들은 본사를 서울에 두었으면 활동 폭이 더 승화됐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표하기도 하는데, '축출한 디자이너 능력의 스포트라이트'가 대전이라는 지역의 한계가 있었다는 것.

그러나 대전을 자랑스럽게 여긴 패션디자이너 정훈종은 오직 능력으로만 공인받길 원한다.

7순을 바라보던 지난해 가을, '2022 아시아 모델어워즈'에서 대한민국 패션디자이너 대표로 '문화체육부장관상' 대상을 거머쥔다.

이 상은, 모델을 비롯해 배우와 가수, 패션, 뷰티 등 아시아 엔터테인먼트 부문별 최고의 활약을 펼친 아티스트를 선정하는 아시아 유일의 최대 규모 엔터테인먼트 축제다.

이보다 앞서 2006년에는 '한국패션브랜드대상 디자이너브랜드 부문 대상'도 수상하며 전국 지명도가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2012년 서울 전쟁기념관에서 개막된 '2012 추계 서울패션위크'에서 '정훈종 컬렉션'은 작품 호평의 화룡점정을 찍는다.

당시 중앙 언론에서는 '동양적인 무드의 컬렉션', '다양한 패턴 속에서 인간의 감정을 자연스러운 흐름의 아름다움으로 승화' 등 카피로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당시 현장을 찾은 패션 피플들은 정훈종 작품의 모델이 걸을 때마다 하늘하늘하게 나풀되는 치마와 원피스 아이템에 크게 매료됐다. 

2015년에는 'DFC 대전패션컬렉션' 대표 디자이너로 큰 주목을 받은 가운데, 이보다 앞서 2008년 '한산모시옷 패션쇼'에서도 남다른 독특한 스타일로 탄성을 자아내기도 했다.

매년 개최되는 'DFC 대전패션컬렉션'에 참석하는 충남대와 한남대, 대전대, 배재대, 대전보건대 등 의류, 의상 전공 학생들은 정 디자이너가 롤 모델이다.

지역 대학생들과 함께, 대전패션 붐업(Boom-up)을 위한 차세대 리더 양성과, 대전시민들이 패션 문화를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만든 선봉장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2016년에는 아시아 최대 패션문화마켓을 지향하는 '패션코드 2016 S/S' 개막식 무대에서 패션디자이너 양대 산맥인 '이상봉 디자이너'와 함께 메인 패션쇼를 진행한다.

출중한 실력으로 지명도가 절정기에 오른 정훈종 디자이너는 대전패션협회장에 이어 2020년 대한민국 패션인들의 최대 기구인 '대한패션디자이너협회(KFDA)' 제22대 회장에 취임, 국내 패션디자이너 산업 도약을 위한 나래를 펴기 시작한다. 

패션디자이너에 입문한 지 45년 만에 대한민국 패션계의 거목으로 우뚝 선 것이다.

지난해 10월, 부산 벡스코에서 개막한 '2022 한.아세안 패션위크'(세계 10개국 20개 브랜드 참여)에서 정훈종 작품은 온라인 705회 재생 중에 297회로 압도적인 1위에 올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지난해 12월에는 대전에서 '정훈종 패션스토리 패션쇼'를 개최했고, 같은 달 '2022 대전패션컬렉션'에 대전 6개 대학과 디자이너 3개사가 참여, 협업을 통해 디자이너 꿈을 키우는 지역 대학생들에 '기품있는 패션'으로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대전대학교 패션디자인.비즈니스학과 김양원 교수는 정훈종 디자이너에 대해 "우리 지역 패션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인재 양성이 우선"이라면서 "학생들의 직무능력 향상을 위해 관심을 갖고 자신의 연구 시간도 학생들에 할애, 작업실을 현장실습처로 개방해 항상 감사할 따름"이라고 고마움을 표했다.

김 교수는 또, "디자인은 물론, 패션제작 공정과 봉제 공정에 이르기까지 학생들이 실무 능력을 키울 수 있었고, 교육부 LINC 사업인 '장인 프로젝트'에서는 기획부터 완성까지 학생들에 대한 조언과 향후 전문가로서의 소양까지 꼼꼼히 지도해주시는 지역의 보배이자 진정한 패션계 어른"이라고 말한다.

-지난해 대전패션컬렉션-
-지난해 대전패션컬렉션-

자신의 취미는 '일'이라면서 달려온 시간, 디자인 작업 중에는 점심조차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을 만큼 일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

대형마트처럼 패션도 기성복화, 디자이너 브랜드가 점차 줄어드는 현실에서 몸을 옷에 맞추는 기성품이 아닌, 자기만의 취향에 맞는 옷을 즐기고 찾을 수 있는 부티크 문화가 재현되기를 소망한다.

정훈종 디자이너의 옷은 작품성뿐만 아니라 전국 소비자에게도 계절마다 다시 찾는 소위, '찐 마니아'가 넘쳐난다. 

대전시 서구 둔산동에 '정훈종 패션스토리' 본사를 두고 있고, 롯데백화점 대전점과 세이백화점 등 대전 세 곳을 비롯해 '정훈종 컬렉션' 등 전국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부산과 대구, 광주, 인천 등 전국 10개소에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매장에는 희소가치를 위해 한 가지 디자인에 딱 3벌만 55. 66, 77사이즈만 전시한다.

'서울패션위크 컬렉션'을 비롯해 '뉴욕 Fashion Market Day', '프랑스 Pret-a porte 컬렉션', '한산모시옷 패션쇼' 등 국내·외 유수의 패션 페어와 컬렉션에 참가하는 등 대한민국 대표 디자이너 중 한 명인 대전의 자랑스런 브랜드 '정훈종'!

해외 고정바이어로부터 오더를 받는 국내 대표적인 디자이너로 패션과 대중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은 '정훈종 패션'은 심플하면서도 볼륨감있는 디자인에 수작업을 이용한 쿠튀르적인 포인트와 함께 꽃을 주제로 화사하게 피어나는 패션스토리를 의상에 입힌다.

중ㆍ상류층 여성을 중심으로 전개한 고감도 캐릭터 디자이너 '부티크'(butik:여성을 위한 최신 유행 옷 상점)로, 단순하면서도 전위적인 화려함을 현대적 감각으로 잘 살려낸다.

여성스러우면서도 캐릭터가 강한 디자인이 주를 이루고,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이미지는 엘레강스(우아함) 하면서도, 도회적 세련미와 로맨틱한 분위기를 현대적 감성으로 연출한다.

작품에 따라 단순함과 화려함을 적절히 조화시켜 여성스러우면서도 아름답고, 무릎이 드러나지 않는 길이의 롱 스타일에 '미니 스타일'보다는 '미디 스타일'이 특징이다.

주요 색상은 검정색에 빨강과 파랑, 갈색, 회색, 흰색을 혼합해 강한 캐릭터를, 소재는 울이나 실크, 한산모시, 면 등의 천연소재를 주로 사용해 고급스러운 실루엣을 강조하고 있다.

브랜드 전개 48년 세월을 한 땀 한 땀 일궈내면서 국가 대표 패션디자이너 중 한 명으로 금자탑을 쌓은 한국의 1.5세대 디자이너! 

"젊을 때 명동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하고 생각도 하지만 대전사랑은 변치 않는다.

대전에 본사를 두어 서울에 비해 각종 정보를 늦게 접해 활발한 활동을 하기에 장애도 따르지만, 고향을 지키다 보면 '정훈종 패션'을 꾸준히 사랑해주시는 분들로 대전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다. 

홀트아동복지회 미혼 모자 후원회에 자신이 디자인한 고가의 스카프를 기증, 그 수익금을 기탁하는 지역 사랑으로 대전시민의 사랑에 보답한다.

오직 패션 한 길만을 걸어오면서 잠도 설치고 고민하기도 한 세월이지만, 패션을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는 뼛속에서부터 패션디자이너는 그의 천직이다.

의사 아들과 아빠처럼 디자이너 길을 걷고 있는 교수 딸 1남 1녀 모두 결혼, 두 명의 손주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7순을 맞은 정훈종 디자이너는, 최근 외과 수술로 몸 컨디션이 최상은 아니지만, 대전 지역 패션 전공 학생들과 기성 디자이너들이 함께하는 전국 유일의 패션쇼인 ‘2023 대전패션컬렉션'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다음 달(10월 11일 오후 7기 호텔ICC) 대전시 주관으로 개최되는 이 행사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전대와 충남대 등 5개 대학 전공 학생들과 정훈종 디자이너를 비롯한 김유미 디자이너(한복), 남은경 디자이너(무대의상) 등이 함께 무대에 오른다.

7순에도 오히려 혈기 넘치는 청년처럼 활동 보폭을 넓히고 있는 패션디자이너 정훈종은, 후배들이 자신을 넘어선 새로운 패션디자이너의 계보가 이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대담 박붕준 충청헤럴드 회장 / 촬영 강경민 기자>

*패션디자이너 정훈종은

▲1954년 9월8일 금산군 금성면 마수리 출생 

▲대한패션디자이너협회 회장 

▲대한복식디자이너협회 회장

▲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 부회장 

▲한국패션협회 이사 

▲대전패션협회 회장  

▲배재대 의류패션학과 겸임교수(전) 

▲정훈종 패션스토리 대표

 

▲2022년 아시아모델어워즈 국제문화교류 공로상(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2010년 제20회 한국섬유패션 대상(디자이너 부문) 

▲2006년 한국패션브랜드 대상(디자이너 부문)

▲2003년 한국패션브랜드 대상(디자이너브랜드 부문/산업자원부장관상)

 

▲가족, 부인 강인자 씨 사이에 1남 1녀 
▲취미, '디자인 연구' 

 

박붕준 작가 캐리커처
박붕준 작가 캐리커처

작가 박붕준은 경희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강릉 MBC, 대전 MBC TV&라디오 뉴스 앵커, 보도국장 역임 후 정년퇴임 했습니다.

퇴임 후 대전과학기술대학교 광고홍보과, 교양교직과에서 11년간 석좌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다 올 2월말 퇴임 하였습니다.
현재, 대전교통방송 '박붕준 교수의 대전토크' 코너를 진행하고 있고, 2023년 3월 1일 충청헤럴드 회장으로 부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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