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가니 산국이 피어나 온 세상이 노란색으로 물들었다. 우리 뜰에도 온 군데서 산국이 꽃 피어 그윽한 향기를 뿜는다. 꽃내음에 취하니 마음은 자꾸만 옛 시절로 도망가서 추억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대학 시절에 가서 머문다.
어머님은 임진강 가의 작은 마을에서 살고 계셨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찾아가면, 사 들고 간 《소년중앙》을 기다리고 있는 여동생이 있었다. 둘은 자전거를 타고 코스모스와 산국이 만발한 길을 따라 깊어가는 가을을 달려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을 오르곤 했다. 강 건너 민간인이 드나들 수 없는 곳에선 단풍이 곱게 물들고 있었다.
그땐 왜인지 정처 없이 돌아다니기 좋아했다. 술 취한 친구들과 헤어져 명동 거리를 헤맸고, 한없이 종로거리를 걷기도 했다. 지리산 능선이 훤히 보이는 금대암에 오르고, 먼데 바닷가를 돌기도 했다. 그러다 꽃향기에 마음이 부풀어 오르면 낙서 쓰기를 즐겼다. 그때 써놓은 글은 대부분 긴 세월에 녹아버렸으나, 책 뒷장이나 편지에 들어있는 것이 몇 개 남아 있어 그중 하나를 골라 여기에 옮긴다.
산국화 향기 그윽합니다
그만치 가을은 깊었습니다
아침결에 내린 서리는
아낙들의 손길을 서둘게 했습니다
임진강 흐르는 아스팔트길엔
이따금 다니는 시외버스가 지날 뿐
그토록 찬란한 코스모스의 모습도
이제는 외로움에 젖었습니다
강 건너 야산엔 단풍이
긴 역사를 두고 흐르는 강 빛에 젖어
한낮의 따스함도 잊어버린 채
마냥 가을만을 사는
엊그제 지나간 길가
그 옛날 거닐던 밤길
그 길로 산국화 피
그 향기 속에 자전거는 달립니다
가을이 여름에서 겨울로 미끄러지듯
그런 빠름으로
체인도 돌지 않으면서
내리막길을 질주합니다
그 길에 코스모스 외롭고
산국화 향기 그윽하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빨간 고추잠자리
늦가을 따라 달아납니다
작가 안진흥은 서울대학교 식물학과를 졸업하고 캐나다에서 대학원 과정을 공부했다.
워싱턴주립대에서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귀국 후 포항공과대학교와 경희대학교에서 식물을 재료로 분자생물학 연구를 수행하였다.
생산량이 증가하고 품질이 우수한 벼 품종 생산을 위하여 다양한 유전자를 발굴하고 보급하였다.
대한민국학술원 및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회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