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박정희 대통령은 대전의 국방과학연구소장에 긴급 밀명을 내렸다.
"나라의 명운이 걸린 문제이니 즉각 유도탄 개발에 착수하라!"는 것.
1969년 7월 '닉슨 독트린'이 나온 직후의 일이다.
1969년 7월 25일 닉슨 미국 대통령은 동맹국들의 '자주국방 능력 강화'를 역설하고, 미국의 부담 감축 방침을 천명했다.
닉슨은 "미국은 일본과의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그리고 당시에도 계속된 베트남 전쟁으로, 아시아처럼 미국의 국가적 자원을 소모시킨 지역은 일찍이 없었다"면서 "아시아에서 미국의 출혈은 더 이상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기 때문!
소위, 닉슨 독트린은 대한민국에는 청천벽력(靑天霹靂)으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직접적인 군사적 도움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로 인식, 즉각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 되었다.
닉슨은 우방 및 동맹국들에 대한 조약상의 의무는 지키겠지만, 핵 공격 이외의 공격에 대해서는 당사국이 그 1차적 방위를 책임지라고 했다.
핵우산과 경제원조는 계속하겠지만, 군사적 개입은 줄이겠다는 선언으로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산 무기라고는 소총 한 자루도 못 만드는 나라에서 1차적 방위를 책임져야한다는 말에 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으로 바꿔낸 사람!
바로 대전에 둥지를 틀었던 국방과학연구소(ADD) 유도탄 개발의 총책임자였던 올해 85살의 이경서 박사다.
박정희 대통령이 유도탄을 꼭 만들어야 한다고 단호히 명령한 배경은, 당시 북한이 가지고 있었던 소련제 프로그(Frog)라는 사정거리 70km인 로켓으로 휴전선 인근에서 쏘면 서울에 떨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도 로켓, 즉 유도탄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
서울에서 평양까지 약 170km로 박 대통령이 원한 미사일은 바로 이 용도로 유사시 직접 평양을 때릴 수 있는 지대지(地對地) 유도탄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소총 한 자루도 제대로 못 만들던 시절로, "국가적으로 달려들면 만들 수 있다"는 이 박사의 말에 박 대통령이 화답, 6년만에 해냈다.
지금은 대한민국이 세계 유수의 방위산업 선진국이지만, 시작은 미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방위산업 육성이 자주국방의 첫걸음이자 긴급히 필요한 사업이라고 인식했고 이에 국방과학연구소를 세워 무기 생산 연구를 지시했다.
당시 북한은 탱크까지 자체 생산하던 수준인데다, 닉슨 독트린이 발표된 이상, 무기 생산에 관한 남북 격차를 하루라도 빨리, 무조건 줄여야 했기 때문이다.
국방과학연구소에서 가장 먼저 일명, '번개사업'을 시작, 3개월 안에 기관총, 소총 등 시제품을 만들라는 지시에 성능이 많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겉은 비슷한 소총과 기관총 시제품을 3개월 안에 만들었다.
기관총 부품은 1/10,000mm 수준의 정밀도를 요구하는데, 당시 우리나라는 1/100mm 정밀도 부품도 생산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장난감(?) 수준의 모조품 무기였지만 어쨌거나 총알은 발사되었다.
제대로 된 무기를 만드는 수준까지는 갈 길이 멀었지만, 번개사업을 시작했기 때문에 미국기술지원단이 와서 기술 도면 등 자료도 줘, 우리나라 무기 제조 기술의 성장 계기가 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익(國益)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지는 지도자로, 이번에는 장거리 유도탄을 개발할 능력이 있는지 검토해서 보고하라는 지시다.
다들 번개사업에 정신이 없을 때로,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서 ADD로 막 옮겨온 이경서 박사에게 책임지고 보고서를 만들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이경서 박사는 MIT에서 석·박사를 하고 미국 BBN사 선임연구원으로 일하던 중 해외 과학자 유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국가의 부름을 받고 귀국했다.
귀국하면 연봉도 미국의 25% 수준으로 낮아지는 것을 알면서도, 언젠가는 꼭 귀국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는데, 그 이유는 실향민이라, 나라에 보답해야 한다는 것을 늘 의식하며 살았다.
이경서 박사는 1938년 평양 태생으로, 부친은 금융업에 종사, 평양에서 초등학교 1학년까지 김일성경기장 인근에 있던 기림리국민학교를 다녔다.
해방된 다음 해 북한에서 1946년 1월 조선중앙은행을 만들고 1947년 12월에 화폐개혁을 했는데 부친이 이를 반대했는지, 언젠가부터 공산당이 가족을 감시하기 시작, 아버지가 먼저 혼자서 월남하셨고, 이후 부친의 연락을 받고 38선을 넘었다.
가족 10명이 함께 떠났는데 감시를 피하다 보니 서로 흩어졌다.
할머니와 형(이봉서 전 동력자원부 장관)과 셋이서 38선을 건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38선 경비병은 민간 경비대 비슷한 사람들로 뇌물도 통했고, 밀수꾼 등 여러 차례 남북을 오가는 사람이 그래도 여럿 있던 시절이다.
경비대는 장사꾼에게는 심하게 굴었지만 일반인들에겐 "다시 돌아가십시오"라며 그냥 풀어준 덕에 다른 길로 우회해서 38선을 넘었다.
어선을 빌렸다. 소위 말하는 똑딱선을 타고 넘어왔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있어요. 선장이 '여기가 〈심청전〉에 나오는 인당수입니다'라고 그러는데 정말 파도가 험했어요. 바닷물도 파랗지 않고 누렇더군요"
국민학교 6학년 때 6·25가 발발했지만 피란을 못 가서 북한군 치하에서 3개월을 살았고 1·4 후퇴 때 대구와 부산으로 피란을 갔고, '천막학교'에 다니다 바뀐 제도에 따라 제1차 국가시험을 봐, 경기중학교에 합격했다.
경기중.고에서 각별히 친했던 동기동창으로는 훗날 과학기술처 장관을 지낸 정근모다.
"저희 집안 분들이 대부분 상과(商科)를 나오셨습니다. 아버님도, 형도, 큰아버님도 사촌들도 대부분 금융계로 가셨어요. 저는 다른 길을 걷고 싶어 기계과를 선택했죠!"
대학 2학년을 마친 이 박사는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당시 MIT는 학문적 혼종교배(混種交配)를 지향해 자교(自校) 출신 석·박사 진학률을 20% 내외로 제한했는데도 학사,석,박사를 했으니 최고의 수재로, 당시 미국 생활을 같이 했던 인사로는 친구 정근모 외에 배순훈 전 대우전자 사장, 이태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 등이 있다.
MIT에서 박사를 마치고 하버드대, MIT 교수들이 공동으로 세운 연구소에서 3년간 근무하다다가 귀국 제의를 받고 미련 없이 짐을 쌌다.
1969년, 도미(渡美) 10년 만이었다.
귀국 후 첫 프로젝트는 '기계공업 육성 방향' 수립.
우리나라 여건에 맞는 리더 인더스트리(leader industry) 딱 하나만 중점 육성해야 한다는 안(案)을 마련했다.
산업 기반이 총체적으로 부실한 상황에서 여러 산업을 동시에 육성한다는 것은 욕심이 지나쳐 성과를 내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
"보고서를 낸 후 상세한 계획서를 내라고 지시를 받았고, '유도탄 개발 계획'이라고 할 수 없으니까 '항공공업'이라는 위장 명칭을 썼죠. 아파트 하나 빌려서 군(軍)에 계신 박사분들 몇 분하고 3개월 동안 작업했고요! 극비 보안 사항이라 가족들한테 연락도 못 했어요. 정보 당국에서 저희 숙소를 지키고 있었죠"
대통령이 사인하자 일 처리에 탄력이 붙었다.
연구비가 나오고, 대전에 유도탄연구소도 만들었다.
"200km 사정거리 유도탄을 개발한 것이 말은 간단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첩첩산중이었는데, 사실 아이디어도 없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운이 좋고, 하늘이 도와서 성공한 프로젝트입니다"
사정거리 200km 유도탄을 개발한다고 하면 미국이 주목할 것이고, 우리 군이 보유한 미국산 나이키 미사일을 유지·보수하는 것처럼 하면 감시망이 헐거워질 거라 생각했다.
또한 나이키는 당시 미국에서 거의 퇴역(退役)한 상태로 나이키 관련 정보를 달라는 명분도 확실했다.
나이키는 지대공(地對空) 유도탄이지만, 지대지로서도 한 140km는 날아가는데 이걸 개조하면 사정거리 200km 유도탄이 충분히 나오겠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미국은 군비증강을 원하지 않았는데, 남북이 서로 경쟁하면 군사적 문제가 생길 가능성도 커지기 때문이다.
지금은 우리가 700km까지 사정거리를 늘렸지만, 미국과의 여러 과정을 거쳐서 늘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핵 개발은 실제로 추진됐을까?
"제가 아는 바로는 그때 프랑스에서 재처리시설 들여오는 프로젝트가 실패한 후에는 구체적인 움직임이 없었어요. 처음에 박정희 대통령의 궁극적인 목표는 핵 개발이었죠. 하지만 중간에 하도 미국이 감시하고 견제하니까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 겁니다. '원자탄 제조 기술이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온다', '간단한 실험장비로도 얼마든지 제조 가능하다'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핵무기는 국가적 노력이 투입되어야 만들 수 있습니다. 미국은 프랑스가 우리나라에 재처리시설을 팔았을 때 생기는 이익을 물어주면서까지 한국의 핵 개발을 막았습니다"
미사일 개발 당시 가장 어려웠던 기술적 난제는 추진기관과 유도장치로 1차적인 문제는 추진제였지만 우리에겐 기술이 전혀 없으니, 외국에서 도입하는 길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다.
고민하던 중 미국에서 낭보가 전해졌다.
"추진제를 만드는 회사가 수요가 없어 공장을 몇 년째 놀리고 있는데 설비를 처분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경기가 나빠서 급하게 팔려고 하니, 잘하면 싸게 살 수도 있다고 해요. 프랑스 방문 중 급히 미국으로 가 그 회사 부사장을 만났는데, 공장엔 사람 하나 없고 그냥 시설만 있었어요. 완전히 버려둔 지 2년 정도 지났다고 하더군요. 얼마에 팔겠냐고 하니까 200만 달러면 오케이래요. 국무부 허가 얘기도 했더니 그건 자기들이 해결하겠다고 했어요"
낡은 공장을 5개월간 통으로 뜯어왔다.
"그쪽에서 기술을 안 주려고 그랬는데 매뉴얼 등을 다 들고 왔습니다. 국무부에서 반출을 허가한 기계에만 테이프가 붙어 있고 그것만 가져올 수 있는데, 안 붙어 있는 것까지 그냥 싹 다 들고 왔죠. 쓰레기까지 다 가져왔습니다"
쓰레기까지 가지고 왔다는 소문은 청와대에까지 들어가 대통령이 현장 점검을 나와 300갤런 믹서기 앞에서 믹서가 제대로 돌아가는 걸 보고 흡족한 모습을 보였다.
"당시 미국 방위산업은 월남 전쟁도 끝나고, 무기 쓰는 곳도 없었죠. 그래서 부도 직전까지 몰리니까 나이키 허큘리스 만든 회사에서 우리한테 제안이 왔어요. '한국에서 사정거리 200km 유도탄을 만든다는데, 아예 우리가 나이키를 240km 지대공 유도탄으로 개조해서 주겠다. 그걸 사라'는 겁니다. 단, 기술 제휴는 없고 자기들이 만들어서 팔겠다. 한 발에 얼마씩이다고 말이죠"
이 문제는 ADD가 아니라 국방부 차원에서 논의가 오갔다.
나중에 의견을 묻기에 이경서 박사는 '야, 이거 무슨 방법이 있겠다'는 느낌이 왔다.
국방부에다 '일단 사겠다고 그러십시오'라고 했어요.
한데 국방부 측에서는 '구입은 간단하다. 하지만 대통령께서 원하시는 건 우리가 자체적으로 기술을 확보하는 것 아니냐. 사 오는 걸로 만족하시겠느냐?'고 하더군요.
"그래서 처음에는 예비 설계를 하고, 우리가 검증을 끝내면 디테일한 설계를 하자. 모두 합격하면 그때 주문하겠다고 하니까 미국에서도 거절할 수가 없었죠. 미국 회사 사정도 급했고요. 미사일 만든 회사에서 국방부, 국무부를 설득했습니다. '이건 예비 설계 정도니까, 디테일한 정보를 주는 것이 아니니까 기술 유출도 없다' 그래서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이경서 박사를 포함한 한국 엔지니어 6명은 미국으로 건너가 6개월 동안 '전투'를 치렀다.
맥도널 더글러스사에서 전자 장비를 비롯한 노트 하나 못 가져가게 했지만, 우리 연구원들은 '모든 정보를 최대한 머릿속에 담아 오자'는 정신으로 낮에 보고 온 것을 밤에 숙소로 돌아와 기록으로 남겼다.
"처음엔 그러다가 나중엔 한계가 와서 정말 못 할 짓을 하기도 했어요. 보고서를 훔쳐 나와 밤새 복사했어요. 하하하!"
그리고는 6개월 후에는 안 사겠다고 했죠. 조사 결과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결국 2000만 달러 예산을 단, 163만 달러 주고 예비 설계만 하고, 나머지 본 설계 내용까지 다 뽑은 것.
"관성(慣性)유도장치를 들여왔는데, 정말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겁니다. 그 기술을 갖고 있는 나라가 미국, 영국, 프랑스뿐인데 미국과 프랑스에선 말도 꺼내지 말라고 했어요"
무작정 스코틀랜드로 날아가 관성유도장치 20개, 그것도 엄청난 고가품을 동양인이 대량으로 구입한다고 하니 그쪽 회사에서도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다.
국제거래 허가 품목이었지만, 이경서 박사에게는 복안(復案)이 있었다.
"이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었느냐. 당시 일본이 비행기를 개발했는데, 관성유도장치를 미국이 팔았어요. 저는 영국 회사에 가서 '미국도 일본한테 팔았는데 왜 너희는 우리한테 못 파느냐'고 했죠"
영국 페란티(Ferranti)사에서는 당연히 팔 수 있다고 했지만 관성유도장치의 항법장치에는 미국 기술이 들어가 있어, 미국 허락 없이는 영국 정부도, 페란티사도 마음대로 판매가 불가능했다.
이경서 박사는 "당신들이 우리하고 계약한 다음에 이 사실을 미국에 언제까지 알려줘야 하느냐?"고 물으니 "6개월 내에만 알려주면 된다"고 답했다.
이경서 박사는 "우리 연구원을 영국으로 파견할 테니 설계 및 생산 기술을 전수해줘라. 미국에는 6개월의 마지막 날 통보하면 협정 위반은 아니지 않으냐"고 했다.
워낙 국제적으로 민감한 문제라 청와대에도 보고하지 않고 은밀하게 처리했다.
"그러니까 청와대에서도 몇 사람만 알고 아무도 몰랐습니다. 계약하고 연수 마치고 6개월 딱 되는 날 미국에 알려줬어요.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야단이 나가지고, 청와대 오원철(吳源哲) 경제 제2수석비서관에게 전화를 했죠. 오 수석이 저에게 전화했기에 그때 제가 실토했습니다. 처음엔 오 수석이 화를 내더니 이내 조용해요"
오 수석이 보니, 우리도 관성유도장치 기술을 갖게 됐으니까 앞으로 인공위성도 올릴 기술을 확보한 것을 대통령께도 보고했기 때문이다.
1978년 우리 유도탄 '백곰'이 개발 6년만에 드디어 대한민국에 첫 모습을 드러내 그 해 9월 26일에는 마침내 백곰이 하늘을 날아, 대통령을 포함한 참석자들은 모두 일어나 만세를 부르고 부둥켜안고 울었다.
이경서 박사는 회고한다.
"하나의 국가가 있기 위해서는 자주국방은 절대적인 것으로, 박 대통령이 자주국방을 하기 위해 기계공업을 육성했고 산업화의 기틀을 다졌기에 지금 우리 대한민국이 국가다운 국가일 수 있는 겁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깨끗해요. 그리고 이해력이 빠릅니다. 전문가의 의견이 있다면, 핵심이 뭔지 바로 아시고, 정확하게 지시하셨죠. 전문가 입장에선, 자신의 전문성을 최대로 인정해주고, 전문성을 살려 일할 환경을 만들어주는 리더가 최고입니다. 평생을 두고, 제 제안을 대통령이 100% 이해하고 지지하신다는 느낌만큼 짜릿한 경험은 없었습니다"
자주국방(自主國防)과 자립경제(自立經濟) 달성은 박정희 평생의 꿈으로, 국가 예산의 48%를 미국의 원조로 채우던 나라가 1950~1960년대의 대한민국이다.
박정희는 경제적·군사적으로 자립 능력이 없는 나라는 끝까지 남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봤다.
국력에 비해 과도한 규모의 군을 유지하며 동시에 경제개발도 해야하는 모순적 과업을 필사적으로 수행하던 박정희 대통령은 무슨 방법을 쓰든 혈로(血路)를 뚫어야 했다. 그중 하나가 무기 개발, 특히 유도탄 개발이었다.
박정희가 없었다면 이경서는 유도탄 개발을 하지 못했을 것이요 이경서가 없었더라면 박정희는 유도탄 개발을 실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작가 박붕준은 경희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강릉 MBC, 대전 MBC TV&라디오 뉴스 앵커, 보도국장 역임 후 정년퇴임 했습니다.
퇴임 후 대전과학기술대학교 광고홍보과, 교양교직과에서 11년간 석좌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다 2023년 2월말 퇴임 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