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로. 늦여름에 흰색으로 꽃 피었다가 점차 연두색으로 바뀐다. 습하고 그늘진 곳에서 잘 자란다. 씨를 파종하거나 포기나누기로 번식한다.

커튼을 여니 아내가 벌써 일어나 호박 덩굴이 타고 자라나도록 울타리에 끈을 매주고 있다.

퇴비 더미에서 자라난 것을 보면 작년에 버린 호박씨가 발아한 것 같은데, 아내는 그 개똥 호박에서 어떤 열매가 열리는지 궁금한가 보다.

봄철에 시장에서 사다 심었던 애호박은 한동안 정신없이 열매를 맺어서 아침저녁으로 먹고 이웃에 나누어주기 바빴는데 이젠 수꽃만 피고 어쩌다 핀 암꽃은 열매로 자라나지 못한다.

오이도 이제는 열매가 잘 열리지 않고 그나마 열리는 것은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할머니 등처럼 꼬부라진다.

제 할 일을 다 해 캐어버리자고 했더니 아내는 그냥 놔두어 보라고 한다.

그동안 수고를 했는데 열매를 못 맺는다고 내쳐 버리는 것이 매정하다고 느꼈나 보다.

늙어서 쓸모가 없어 보여도 살아가고 싶은 욕망은 모든 생명체에게 있을 것이니 함께 살자는 생각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자연과 함께 사는 것은 내 의지를 죽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인내를 키우는 것이다.

텃밭을 가꾸는 후배에게서 늦게까지 열매가 달린다는 오이를 얻어 와서 씨를 받아 두었다가 키운 녀석은 아직도 열매가 잘 열리며 맛도 괜찮다. 후배에게 물어보니 토종 오이라고 한다.

어렸을 때 밭에서 보던 오이처럼 열매가 통통하다.

노랗게 무르익은 것을 따다가 씨는 긁어 버리고 속껍질을 얇게 썰어 고추장에 무친 반찬을 즐겨 먹었었다.

토종 오이 노각에는 몸 안의 노폐물을 배출시키고 부종을 해소하는 등 건강에 좋은 성분이 많다고 하니 씨를 받아 두었다가 내년에 또 심어야겠다.

텃밭에서 생기는 것이 많지 않아도 뒤뜰이 풍성해서 좋다.

한여름에 피는 연두색 꽃이 좋아서 푸른여로 뿌리를 뒤뜰에 심어놓았더니 살아 견뎌서 꽃으로 찾아왔다.

길게 자란 꽃줄기에 달린 자그마한 꽃 하나하나가 깊은 산처럼 청초하다. 푸른여로 꽃이 활짝 피면 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마냥 걷던 지리산 능선길이 그리워져 뒤뜰 오솔길을 걸어본다.

젊어선 지리산에 여러 번 갔었다.

채집하러 천왕봉에 몇 번을 올랐고, 친구들과 화엄계곡을 올라 지리산을 종주했으며, 과외공부 가르치던 학생들 데리고 칠선계곡을 내려가다가 비박을 하기도 했다.

그중 세석평전에서 장터목 가는 능선길이 가장 좋았다. 동자꽃과 푸른여로가 기다리는 그 길을 다시 한번 걸을 날이 오려나 싶다.

안진흥 작가 캐리커처
안진흥 작가 캐리커처

작가 안진흥은 서울대학교 식물학과를 졸업하고 캐나다에서 대학원 과정을 공부했다. 

워싱턴주립대에서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귀국 후 포항공과대학교와 경희대학교에서 식물을 재료로 분자생물학 연구를 수행하였다. 

생산량이 증가하고 품질이 우수한 벼 품종 생산을 위하여 다양한 유전자를 발굴하고 보급하였다. 

대한민국학술원 및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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