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뒤 두메산골(?) 강원도 강릉방송국으로 첫 발령을 받아 근무하던 50년 전, 1970년대 중반! 지금은 시골버스도 에어컨이 빵빵(?) 나오지만, 당시에는 버스에 선풍기만 달려 있어도 '서비스 최고'였던 시대였다.
지금처럼 '시스템 에어컨'이라는 멋진(?) 말로 불리는 천장형 에어컨에 '무음 에어컨'이 자태를 뽐내지만, 50년 전에는 소음이 심한 벽걸이 에어컨이 있는 가정이 '재벌(?) 집'이라 어깨를 펼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김일 박치기 프로레슬링'을 보려면 만화방에 가서 일정 수량의 만화를 본 뒤 주인이 주는 '텔레비전 시청 딱지'를 모아야 했다.
김일 선수의 박치기에 일본 선수가 유혈이 낭자했지만, 흑백 텔레비전이라 혈흔 색깔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텔레비전을 본다는 것 자체가 '따봉'이었다.
서울 가정에도 TV가 드물던 시절, 시골 강원도에서 에어컨을 찾는 것은 해수욕장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보다 더 어려웠다.
그러나 50여 년 전에도 에어컨이 가동되던 곳이 있었으니, 바로 방송국이다.
"여기서 잠깐!" 방송국이라고 해도 지금처럼 모든 건물 내부가 냉방된 것은 아니었다.
'주조종실', '녹음실', '사장실' 단 세 곳에만 에어컨이 설치돼 있었다.
그런데 벽걸이 에어컨 소음이 커서, 생방송 중 아나운서나 기자가 내레이션을 할 때는 시끄럽다고 잠시 껐다가, 음악이나 광고가 나갈 때 재빨리 다시 켰다.
당시엔 리모컨이 없어, 기기에 달린 버튼을 직접 눌러야 했다.
불편했지만 시원함 앞에서는 아무것도 문제되지 않았다.
오히려 사흘에 한 번 돌아오는 숙직일은 에어컨 덕분에 즐거웠다.
좁은 하숙방에서 더위에 잠 못 드는 것보다 방송국 숙직이 '바캉스'였기 때문이다.
라디오는 지금 24시간 방송되지만, 50년 전엔 아침 6시 애국가 송출부터 새벽 1시까지만 정규 방송을 했다(정부 전력 절감 정책).
방송이 끝나면 에어컨은 곧 내 차지였다.
하지만 '에어컨 사랑' 직원은 많았다.
숙직이 아닌데도 늦은 밤이면 주조종실에 사람들이 몰렸다.
술에 취한 선배는 "나 여기서 잘 테니 신경 쓰지 마!"라며 카펫이 깔린 스튜디오 바닥(청소가 거의 안 돼 지저분한 바닥)에 드러눕곤 했다.
가난했던 시절, 선배가 에어컨 밑에서 자겠다는 데 후배가 어찌 말릴 수 있겠는가.
밤 11시 마감뉴스 생방송을 앞둔 시각, 선배는 이미 방석을 베개 삼아 잠들어 있었다.
그대로 뉴스 생방송이 시작됐다.
"마감 뉴스입니다. 휴일인 오늘 경포대 해수욕장에는 30만 명의 피서객이...(중략)"
방송이 시작되고 2분쯤 지났을까.
얌전히 주무시던 선배가 코를 골기 시작했다.
내레이션을 하면서 발을 뻗어 선배를 '툭툭' 찔렀다.
효과는 잠시뿐, 곧 다시 코골이가 이어졌다.
결국 뉴스 멘트보다 코골이에 신경을 더 쓰느라 내가 무슨 내용을 전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밤 11시, 내 목소리와 선배의 코골이가 믹서된 방송을 들은 청취자들은 "위층이나 옆집에서 나는 소리인가?"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술 취한 손님을 태운 택시 기사라면 라디오에서 나온 코골이를 손님 소리로 착각했을 법도 하다.
하늘같은 선배를 발로 찬 후배가 대한민국 방송국에 또 있었을까?
그 선배는 이 사실도 모른 채 이미 하늘의 별이 되셨다.
작가 박붕준은 경희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강릉 MBC, 대전 MBC TV&라디오 뉴스 앵커, 보도국장 역임 후 정년퇴임 했습니다.
퇴임 후 대전과학기술대학교 광고홍보과, 교양교직과에서 11년간 석좌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다 2023년 2월말 퇴임 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