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위에서 뒤척이는 달을
기와 아래 책갈피처럼 끼우고
오늘도 백 년의 속삭임을 정독한다
오래된 책장을 넘기듯 연못을 펼치면
붓꽃은 첫 문장의 머리글자,
오리떼는 쉼표가 되어 물결의 행간을 가른다
나는 독서대처럼 서서 배롱나무를 읽는다
연꽃이 피는 페이지에 이르자
다시 사랑을 믿기로 한다
사라지는 이름들을 되짚으며
청록색 문장 끝을 적신다
바람의 자음과 연잎의 모음이 만나
연분홍빛 운율로 고요가 핀다
팔작지붕 아래, 오래된 슬픔을 한 줄씩 말리고
새들이 떠나는 방향으로 문장은 열린다
기와 그림자 따라 시간이 줄을 서면
나는 물가의 순번표를 들어
그리운 이도
잊으려는 이도
책 한 권처럼 나에게 온다
[작품 해설]
연화정도서관에 오래 머물다 보면, 물 위에서 뒤척이는 달을 기와 아래 책갈피처럼 끼운다. 붓꽃은 머리글자, 오리 떼는 쉼표가 되는 연못에서 나는 물결의 행간을 따라 한 장씩 페이지를 넘긴다. 깊이 접어 둔 마음이 연분홍빛 고요로 솟아오를 때 ‘사랑’이라는 단어가 여백을 채운다. 나는 사서처럼 먼저 도착한 풍경과 한발 늦는 풍경을 차례로 정리해보다 작은 칸 하나를 비워 둔다. 오늘의 마지막 쉼표가 내일의 첫 문장이 된다.
성은주 시인
2010년 《조선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창', 그림책 '한 걸음씩 꽃피는' 등
현재 한남대학교 국어국문창작학과 강의전담교수
성은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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